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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명고> 공자 글쓰기의 뒤늦은 발견
이한우(영문81) 편집위원 논어등반학교장 ‘문청’을 동경한 적도 없고 심성도 정감이 풍부하기보다는 무덤덤한 편이라 글쓰기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던 적은 없었다. 대학원 시절 철학 공부를 하면서도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좋아했지 문체가 뛰어난 글을 볼 줄 아는 안목조차 없었다.부끄러운 이야기지만 30년 가까운 언론인 생활을 하는 동안 글쓰기를 직업으로 했으면서도 글쓰기 혹은 글의 힘은 잘 몰랐다.뜻밖에 글쓰기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은 공자(孔子)에게서다. 2007년부터 공자 공부에 뛰어들어 한문 독해를 다 익히고서 원문으로 읽게 된 공자의 글쓰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아마 이 말에 대해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공자가 도덕 이야기야 잘 했겠지만 글쓰기를 잘 했다고? 그만큼 우리 사회의 공자 이해 수준은 얕고 낮다. 무엇보다 수많은 오역(誤譯)들이 이런 부끄러운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논어’를 펼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구절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다. 이 말은 미리 말하자면 사람다워지려고 열렬하게 애쓴다는 뜻의 문(文)을 배워서 그것을 늘 힘써야 하고 이를 ‘정말로[亦]’ 기뻐하라는 말이다. 지(之)는 지시대명사로 학(學) 뒤에 목적어가 빠져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문(文)이다.즉 한나라 때 제왕학 텍스트였던 ‘논어’라는 책의 첫 머리에 이 글이 실린 이유는 바로 임금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권력과 재물을 모두 소유한 임금이라고 해서 거기에 만족한 채 더 이상 사람의 도리를 배우기를 멈춰서는 안 되고 자신을 낮춰 새로운 도리를 배우는데 힘쓰고 부지런히 익히기를 대충대충이 아니라 ‘정말로[亦]’ 기뻐할 때라야 비로소 그런 임금 곁에 스승의 역할을 할 수있는 사신(師臣)이 나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 [2019-07-12](Hit:33)

일제 관헌의 이용익 선생 사찰기록을 읽고
모교 중앙도서관 앞에 있는 설립자 이용익 선생 흉상(왼쪽). 오른쪽은 ‘이용익 도망실황’이라는 제목으로 극비출국 이후 활동에 대한 일제 사찰기록. 김현석(경제55) 고대3·3동지회장이 이용익 선생에 대한 일제 사찰기록을 읽은 소감문을 보내왔다. 3·3동지회는 국가·민족·민주 이념과 자유·정의·진리의 고대 정신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교우모임이다. 구한말 나라가 망해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역사기록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반도 병탄을 노리는 일제의 계획은 치밀했고 기록이 철저했다. 이용익 선생을 납치할 때부터 러시아 연해주에서 순국할 때까지의 기록 또한 철저하였다. 이용익 선생이 가는 곳마다 주재국 일본 공사나 무역관장의 육필보고서는 지금 읽어보는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고대3·3동지회가 지난해 이용익 선생 망명지인 연해주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이용익 선생의 외증손자 허종(許鍾) 씨로부터 일제 사찰자료를 얻어 참고하던 중 몇가지 중요 사안을 기록하여 본다. 납치 계획부터 실행까지 꼼꼼하게 기록일제는 1904년 1월 22일 이용익 선생 납치계획부터 1907년 2월 24일 러시아 연해주 라즈돌노예 자택에서 순국할 때까지 선생에 관한 동향보고서를 작성했다.“한일의정서 체결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용익을 한국 궁정에서 쓸어내야 한다. 이용익은 후에도 반대할 것인즉, 이(李)의 존재는 심히 방해될 것이므로, 차제에 일본에 만유(漫遊) 시켰으면 좋겠다.”이 전문은 천황, 참모총장, 육군대신, 해군대신에게도 보고됐다. 천황의 동의도 있었다. 선생은 일본 각지의 학교와 산업을 시찰했는데, 다니는 곳마다 현(縣) 지사(知事)의 동향보고서가 상부로 보고됐다. 극비 출국과 프랑스·러시아에서의 외교활동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설립 등 교육활동에 전념하던 이용익 선생은 19... [2019-07-11](Hit:7)

의인 이수현과의 뜨거운 포옹
고 이수현 교우 18주기 추모행사로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서 사진전이 열렸다. 고 이수현(무역93) 교우를 기리는 18주기 추모행사 ‘한·일의 빛과 꿈, 의인 이수현과의 뜨거운 포옹’이 지난달 14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 대사관 공보문화원 갤러리에서 열렸다. 이수현 교우는 일본 유학 중이던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오쿠보역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올해 추모행사는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주관으로 이 교우의 생애를 담은 사진 30여 점과 한국과 일본 정부 훈장, 양국 시민의 추모 편지 등이 전시됐다. 추모곡 공연과 의인 이수현을 그린 다큐멘터리영화 ‘가 케하시(懸橋)’도 상영됐다. 가케하시는 ‘떨어진 양쪽을 잇는 가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수현 교우의 숭고한 뜻은 LSH아시아장학회를 통한 장학 사업, 추모행사 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2019-07-11](Hit:6)

근현대사미술관 개관한 정정숙 교우
경기도 용인시 근현대사미술관에 전시된 5·18민주화운동 관련 작품들. 아래는 정정숙 교우.   정정숙(사학83) 교우가 관장으로 있는 근현대사미술관이 지난달 14일 용인시 동백지구에 개관했다. 근현대사미술관으로 서는 국내 최초다. 동학농민혁명부터 3·1운동, 5·18민주화운동 등 한국근현대사 중요 사건과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그림들이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태극기 변천사와 배삼수 화백의 소나무 그림, 민중화가 홍성담, 전정호, 이상호 화백의 작품, 판화가 오윤의 작품, 이상화 화백의 세월호 희생자 위무 작품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개관식에는 83동기회 합창단 ‘고대83하모니’가 참여해 축하공연을 했다. 관람문의는 031-283-7222 [2019-07-11](Hit:7)

고대박물관 소장 걸작선[5] 이응노 ‘등나무’ (1940년대 초)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는 자신의 30대 시절을 ‘자연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시대’로 구분했다. ‘등나무’는 그의 30대 후반 작품으로 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대문을 통해 들여다 본 한옥집의 풍경을 그렸다. 한 때는 살림규모가 제법 컸을 것 같은 기와집에 할머니가 어린 두 손자를 돌보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낡은 집에는 어울리지 않게 비현실적으로 화사하게 핀 등꽃과 어울려 묘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통 동양화법과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응노는 일본 유학에서 서양화 기법을 체득했고, 40대 이후엔 반추상적인 표현에서 사의적(思意的) 추상, 서예적 추상 표현으로 나아갔다. ‘등나무’는 이응노 작품세계의 중간 부분이자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의미 깊은 작품이다. 현재 고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박유민(한국사98) 모교 박물관 학예사 [2019-07-11](Hit:6)

홍성업, 이영미 교우의 ‘베이글 101’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꼭 여러 번 본 듯한 사람이 있듯, 처음 가본 장소인데도 낯설지 않고 푸근한 공간이 있다.일산의 브런치 레스토랑 <베이글101>이 그렇다.활짝 열어 놓은 테라스에서 불어오는 살랑대는 바람과 잘 어울리는 실내의 푸른 화분들, 자연스레 놓여있는 앤티크 가구들과 소품. 무엇보다 집에서 요리 잘 하는 이모가 정성스레 만들어 준 듯한 브런치 메뉴들과 수제 빵, 쿠키, 그리고 방점을 찍는 음료들까지. 어디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없다.일산의 새 명소 <베이글 101>은 홍성업(경영 80), 이영미(언론홍보대학원) 교우가 함께 운영하는 가족 레스토랑이다. 홍성업 교우의 아버님은 홍일식 13대 총장님, 어머니는 고대 14,15대 여자 교우회장이셨던 故 김상민 선배님이시다. 홍 교우의 집안은 형, 누나 등 가족들이 모두 고대 출신이라 제1회 고대 가족상을 수상하기도 한 명실상부한 고대 가족이다. 그는 입학 하자마자 찾아간 응원단실에서 응원가를 부르며 뜨거운 마음으로 청춘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현대 그룹에 입사, 임원을 끝으로 퇴직 후, 다양한 사업에서 그의 번뜩이는 재치는 빛이 났다. 새로운 걸 만들어 내고, 남이 하지 않은 걸 해보는 게 그의 주특기. 고려대에 중국 유학생을 처음 유치하는 일도 그가 해낸 일이었단다.KBS 아나운서 출신인 단아한 미모의 사모님이 내온 패션푸르트 쥬스는 씨가 오도독 씹히는 상큼한 맛이 일품이다.홍 교우는 <베이글 101> 옆에 <상상 그 이상> 이라는 수제 맥주 펍도 직접 운영하고 있다. 각각 풍미가 다른 수제 맥주를 탭으로 따라 마시는 스타일인데, 준비된 안주가 별로 없다. 제대로 진짜 맥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은 맥주 맛만으로 찾아온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 15가지의 선별된 맛있는 맥주만이... [2019-07-11](Hit:21)

<자명고> 고려대학교의 나무 이야기
김상덕(역교84) 편집위원모교 박물관 학예부 겸 기록자료실 부장2016년 시작된 SK미래관 신축공사로 중앙광장에서 학생회관 쪽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보행자 안전을 위해 교문 서쪽 담장주변의 나무 숲 속에 우회로를 만들었다. 그런데 임시 보행로에 불과한 숲길이 뜨거운 햇빛을 막아줌은 물론 꽤 운치가 있다. 올해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받은 이상일(상학57) 일진그룹 회장이 2005년 개교 100주년기념으로 기증한 100그루 장송 덕분이다. 숲속 길을 걸어보니 생각보다 공간이 넓다. 산 속 고찰을 찾아가는 길 같다. 현재 안암캠퍼스에 나무는 관목류를 포함 약 60만 그루가 있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이 될 만한 나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교목으로 잣나무를 선정한 것은 1968년 5월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상록수인 잣나무는 영어로 ‘Korean Pine’이니 ‘Korea University’인 교명과도 일맥상통하는 탁월한 선정이 아닐 수 없다. 선정 당시 기념행사로 잣나무를 상징적인 공간에 심었다면 지금쯤 재미있는 스토리텔링 나무가 되었을 텐데 잣나무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최근 스토리텔링이 될 만한 나무가 생겨 앞으로 기대가 된다. 명순구(법학81) 법학전문대학원장은 보성전문 초창기 수송동 교사 사진 속의 한 나무가 현 조계사 대웅전 앞의 500년 수령의 회화나무임을 밝혀냈다. 2017년 겨울 조계사 경내에서 ‘회화나무 종자 분양’ 행사가 있었다. 종자는 고대농장에서 싹을 틔우고 묘목으로 키워 현재 법학관과 교내 일부 건물 주변에 식재했다. 회화나무는 학문과 선비를 상징하는 ‘학자나무(學者樹)’로 불리며,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궁궐, 서원, 향교 등에 많이 심었다.이 외에 얘깃거리가 될 만한 나무들이 있다. 대한제국 황실 문장은 황실 가문의... [2019-06-12](Hit:27)

박경찬 교우의 ‘연남전야’
“그냥 막걸리를 좋아해서 안주로 부침을 먹기 위해 합정동까지 나가곤 했었죠. 그러다가 이럴게 아니라 직접 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엉뚱하지만 꽤 그럴 듯한 발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 번도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는 박경찬(서문83) 교우는 주로 공덕시장으로 전을 먹으러 다녔는데, 미리 만들었다 덥혀주는 그 레디메이드가 참 싫었다. 전이란 모름지기 잔치 음식이다. 고소한 기름 냄새, 함께 부치며 수다 떠는 아낙네들의 입담, 한 장 한 장 부쳐져 나오는 전을 가장 뜨거울 때 한 점씩 찢어먹는 재미. 그런 맛이 없는 전은 매력을 잃은 그저 기름기 그득한 정크 푸드일 뿐이다.예쁜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연남동의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따라 꼬불꼬불 걷다 보면 어디선가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겨온다. 작은 플리마켓, 이국적인 찻집, 수공예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한 젊은이들의 거리에 등불도 낭만적인 ‘연남전야’의 입간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주인장은 83년 당시 같은 과 여학생들 뿐 아니라 문과대 여학생들의 가슴까지 설레게 했던 외모의 주인공. 지금도 굽실거리고 숱 많은 그레이의 머리카락과 온유한 미소가 그의 한때의 영화를 설명해 주는 듯하다.식당 이외에도 그가 운영하는 ‘coffee be’라는 카페는 연남동을 오가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러봤음직한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역시 커피를 좋아해서 열었을 뿐이라는 그의 겸손한 말에서 획일적인 체인점을 싫어하는 그만의 고집이 느껴진다.연남전야의 자랑거리는 맛있는 전과 마리아주를 이루는 막걸리다. 유통기한 일주일 이내의 신선한 막걸리를 준비해 놓고 손님으로 오는 친구를 반기기도 하고, 친구가 되어 줄 손님을 모시기도 한다. 연남전야의 주 메뉴는 기름을 최소로 해서 적당한 온도에서 노릇노릇하게 익혀내는 육전이다. 홍어전도 자신이 있으나 젊은이들이... [2019-06-12](Hit:48)

인권연대 기획강좌 ‘3월 1일의 밤’
권보드래모교 국문과 교수박은식은 독립운동지혈사에서 사망자 수를 7509명으로 기록했다. 일본헌병경찰대에서는 사망자 수를 553명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은 그간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된 사망자 수와 일본헌병경찰대에서 기록한 사망자 수 사이의 간극에 대한 질문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3.1운동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대표적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이런 3.1운동은 ‘대표의 정치’ 로 요약할 수 있다. 3.1운동을 살펴보면 평범한 농민이 자기가 세계적 결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마땅히 대표가 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많은 사례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대표로 나서 운동을 이끈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1 운동은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이에 따라 3.1운동을 보는 시선도 많이 바뀌었다. 이런 시선의 변화는 3.1운동이 혁명으로서의 효과를 가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3.1운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종의 죽음 때문에 촉발된 움직임을 과연 혁명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을 통해 민족·민주·공화주의에 대한 문제가 한국에 굳건히 뿌리내리게 됐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메이지 유신은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신해혁명은 실패했지만 혁명으로서의 원동력을 잃지 않았다”라는 말을 했다. 3.1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공화주의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과 고종의 죽음 때문에 촉발된 것을 혁명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 두 가지 부분이 자주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 실패한 혁명이고 무엇이 성공한 혁명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정리 신유경 기자 [2019-06-12](Hit: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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