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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명고> 2월을 응원하다
김정응(신방81) 편집위원FN executive search 부사장설 명절에 있었던 일이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이른바 ‘효도 고스톱’을 쳤다. 가까스로 선을 잡은 어머니가 승자(勝者)의 기쁨을 표시했다. 달타령이라는 노래였다. 정월에 뜨는 저~ 달은 새 희~망을 주~는 달. 2월에 뜨는 저~ 달은 동동주를 먹~는 달. 3월에 뜨는~ 달은 처녀 가슴을 태우는 달...노랫말 중에서 ‘2월’ 이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 왔다. 2월의 자명고 글쓰기가 스트레스로 작용했던 것 같다. 동동주를 먹는 2월은 정월이나 3월의 의미에 비하여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하필 동동주 달일까?” 라며 가족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별 볼일 없으니까 술이나 먹으라는 거지~” 라는 대답이 돌아 왔다. ‘2월 홀대’의 근원은 추측하건데 다음의 이야기가 아닐까한다.  율리우스 시저는 자신이 태어난 7월을 큰 달로 만들고자 2월에서 하루를 가져와 31일로 만들었다. 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의 생일이 들어간 8월을 위대하게 만들고자 2월에서 하루를 빼내 31일로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2월은 이틀이나 수탈(?) 당하는 시련 끝에 지금의 28일로 남았다. 2월이 '약소월'(弱小月) 취급을 받는 이유가 이러한 것이라면 2월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을 조금만 크게 떠 보면 2월은 짧은 일수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24절기 중 첫 번째인 입춘을 만날 수 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 하여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젖어든다.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정월대보름 또한 2월에 있다. 지금은 많이 희미해졌지만 예... [2017-02-15](Hit:8)

추억 돋는 그 맛 , 그릴 데미그라스
매초마다 새소식이 인터넷을 도배하고, 새것의 생소함이 주는 매력조차 지겹다 싶은 요즘, ‘그릴 데미그라스’를 찾았다. 우선 찾아가는 길부터 아날로그다. 요즘 뜨는 동네 삼청동, 북촌에 가려 존재조차 애매한 팔판동 한모퉁이에 간판도 알아보기 어려운 작은 경양식집이 있다. 경영학과 85학번 김재우 교우가 셰프로 직접 경영하는 식당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어릴 때 살던 우리집 거실을 통과하는 것 같다. 특별한 컨셉은 없다. 그냥 편한게 좋다는 주인장의 말이다. 그저 음식 만드는게 좋았단다. 20년 다니던 증권회사를 나와 음식점을 차린다고 하자 아내는 ‘제일 잘할 만한 일을 왜 이제야 하느냐’는 반응이었다고 하니 그의 음식에 대한 사랑을 알만하다. 메뉴도 소박하다. 경양식집이 장안을 휩쓸던 시절, 명동에 큰맘 먹고 나가서 맛보던 그리운 함박스테키, 비프스테키다. 밥드실래요, 빵드실래요, 하는 어려운 선택을 피해가도록 밥과 빵을 다 차려준다. 테이블이 고작 6, 7개. 주문과 동시에 바로 주방에서 고기를 두들겨 만드는 소리가 들린다. 내공이 있는 음식 솜씨 덕분에 제법 손님들이 많다. 규모를 늘이면 어떨까 하는 질문에 김교우 왈,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면 그때부터 음식맛은 포기하는 거란다. 대량으로 만드는 건 하지도 못하고 하기도 싫다. 먹어보니 정말 엄마가 집에서 손으로 조물조물 빚어 만들어준 함박스테이크 맛이다. 내용은 양식인데 형식은 집밥이다. 딱히 대단치도 않은데 어쩐지 정이 간다. 윤여정씨 등을 비롯해서 영화인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오는 손님마다 주인하고 개인적으로 인사를 한다. 집밥의 맛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이 몰래 오가는 나만 아는 식당이란 얘기다. 음식맛의 비법을 말해달라니, 셰프가 실력이 딸려서 재료만은 좋은 걸 쓴단다. 뚝심빼면... [2017-02-15](Hit:12)

<자명고> 비정상의 정상화
정윤석(국문76) 편집위원장강남대학교 석좌교수교수신문이 선정한 지난해의 사자성어 ‘군주민수(君舟民水)’ 국민이 물이 되어 대통령이라는 배를 띄우지만 물결이 노하면 배를 엎을 수 있다는 교훈은 참으로 적절했다. 교수신문은 박근혜 정권 첫해인 2013년 도리를 따르지 않고 순리에 어긋나게 일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도행역시(倒行逆施)’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인사의 파행 운영에 대해 경고했고,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국정원 대선 개입, 정윤회 문건 사건 등으로 석연치 않은 의혹이 증폭되면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농간 정치에 일침을 놓았다. 나아가 2015년에는 ‘혼용무도(昏庸無道)’로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혼군’과 ‘용군’을 빗대어 대통령을 향한 ‘돌직구’를 날렸건만 민심과 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부정부패, 부조리, 불법, 편법 등의 비정상을 바로잡아 법과 원칙이 바로 서고, 투명하고 효율적인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 칼바람 매서운 광화문 거리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깨끗한 나라를 세워가자고 부르짖는 선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사실은 박근혜 정부가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삼겠다고 내건 어젠다인 ‘비정상의 정상화’를 홍보하는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문구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던 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 사회의 비정상을 바로잡아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뒤 정부부처들은 각 분야에 깊이 그리고 널리 퍼져 있는 비정상적인 요소를 찾아내서 정상화시키겠다는 과제를 설정하고 추진 실적을 자랑하는 요란을 떨었다. 그러나 그건 말의 성찬이었을 뿐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비정상이 판을 친다. 2014년 4월 우리 사회의 온갖 비리와 부패를 가득 싣고 항해하던 ... [2017-01-13](Hit:25)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를 읽다
전용호(국문86) 편집국장고려대학교박물관 1층 백년사전시실에는 보성전문학교 개교 이래 다양한 교사자료가 전시돼 있다. 1905년 보성전문학교 개교를 알리는 신문 공고와 1907년 첫 졸업증서부터 다양한 기록물을 통해 모교의 100여년 역사자료를 일람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모교 역사는 그대로 한국의 대학사, 학문사와 일치한다. 모교 역사를 구성했던 교수, 학생, 졸업생의 삶 역시 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고스란히 체현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인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가 모교 박물관 백년사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 이를 상징한다.유진오 선생의 생애는 모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부친 유치형은 보성전문학교 강사였다. 경성제국대학 수석 졸업생인 그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요청으로 1932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1952년부터 1965년까지 모교 총장으로 재임했다. 정계에 투신했다가 물러난 후 유진오 선생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교우회보에 모교 재직시절 회고록인 <양호기(養虎記)>를 집필했다. <양호기>는 모교 역사는 물론 한국 대학 교육사의 자료로 지금도 소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1987년 작고하셨고, 선생의 유족은 모교 박물관에 생전의 각종 저술과 원고 및 유품을 기증했다.1948년 4월 유진오 선생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며 친필로 작성한 ‘제헌헌법 초고’는 군데군데 수정하고 삭제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모교 박물관은 2009년 《현민 유진오 제헌헌법 관계 자료집》(고대출판부)을 발간해 선생이 기증한 제헌헌법 관련 자료를 일반인이 쉽게접할 수 있도록 했다.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는 헌법전문, 총강, 인민의 기본적 권리 의무, 국회, 정부, 법원, 경제제도, 재정, 지방제... [2017-01-13](Hit:135)

향수의 아재 입맛 ‘칠성제면’
소박한 국수맛처럼 깔끔한 외관을 가진 칠성제면의 전경.홍대앞의 현란한 맛집을 약간 비켜선 서교동에 소박하지만 내공있는 국수집이 하나 있다. ‘칠성제면’. 이름은 촌스러운데 간판은 제법 예쁘다. 살짝 안을 들여다 보면 한국의 국수집인지 일본의 소바집인지 모를 아기자기한 실내에 중국무림의 고수 같은 차림의 두 남자가 열심히 직접 손 만두를 빚고 있다. 주방 안쪽에서는 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보던 찐빵 가게처럼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정겹기 그지없다. 이렇듯 국적불명인것 같지만 정작 멸치국수 맛은 어릴 때 먹던 바로 그 맛이다. 할머니가 머리와 배를 딴 멸치로 푹푹 고아서 국물을 내 주시던 그 추억의 국수맛. 이 멋진 제면소를 운영하는 잘생긴 주인이 바로 화공과 83학번 조대연 교우다. 기름회사에서 일하던 공대생이 출판사 <고래가 그랬어>를 운영하다 말고 뜬금없이 국수집을 차린 이유를 물으니 대답 한번 간단하기 그지없다. 하루에 국수를 두끼먹을 정도로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역시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빛이 나는 법. 좋은 밀가루로 아침마다 직접 쫄깃하게 면발을 뽑고,밤을 새워 공들여 우려낸 육수에 국수를 말아 내놓았을때, 손님들이 들어 보이는 엄지 손가락 하나에 이 일 하기 잘했다는 보람을 느낀다는 그. 우리나라에 국수좀 한다 하는 식당을 십년 넘게 돌아다니며 비법을 전수받아서 국수집을 차린 것이니 그의 국수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게다가 황해도 어머니의 입맛 유전자를 지닌 그가 직접 빚은 손만두로 끓여낸 사골 만둣국을 한입 뜨면, 착착 감기는 맛도 맛이지만 이거 받아서 남을까 하는 걱정이 앞설만큼 가격마저 너무도 착하다.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제육볶음에 국수, 거기에 소주 한병을 곁들여도 놀랍게도 천원을 거슬러 받게 된다. 게다가 그는 83학번 동기들과 락밴드를 결성... [2017-01-13](Hit:146)

<자명고> ‘천하의 두 가지 저울’
강재형(영문82) 편집위원MBC 아나운서‘시리’, ‘시해’, ‘비리’, ‘비해’.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하는, 겪을 수 있는 네 가지 경우의 것들이다. 알쏭 달쏭한 이것들은 대체 무엇인가. ‘시해’와 ‘비리’는 그나마 익숙하지만 나머지는 낯설다. 이 넷을 놓고 등급을 매기면 어떻게 될까. ‘시리’가 제일 윗길이고 쓴 순서대로 내려가 ‘비해’가 가장 아랫길이 된다. 원 뜻과 그에 담긴 가르침을 밝히기 전에 삐딱하게 한번 짚어보자.‘시리’는 스마트폰 음성 애플리케이션 이름이다. 아이폰의 ‘Siri’가 그것이다. 나라 안팎을 떠들썩하게 뒤집어 놓은 ‘순siri’ 때문에 재조명되고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시리’가 으뜸이 된다. ‘시해’는 역사적인 사건 두 개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명성황후 시해’, ‘박정희 대통령 시해’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꼼꼼하게 뜻을 바루면 ‘시해’는 이럴 때 쓰는 용어가 아니다. 시해(弑害)의 뜻은 ‘부모나 임금을 죽임’이다.(<표준국어대사전>) 명성 황후 살해는 일본 낭인이 한 짓이고, 살해 당시 박정희는 대통령이지 임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정세급변의 사건임을 인정해 ‘시해’를 버금 자리에 올린다. ‘-연루/-적발/-의혹’ 따위와 붙어 다니는 ‘비리(非理)’는 이 땅에서는 너무 흔해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될 터이니 뒤로 밀린다. ‘비해(萆薢)’는 뼈마디 쑤시는 걸 풀어줘 요통 등을 다스리는 한약재 이름으로 여러해살이풀인 나도물통이의 뿌리이다. 일상에서는 쓰임이 거의 없는 것이니 제일 뒷전으로…. 진짜? ‘Siri’에서 ‘나도물통이 뿌리’까지 휘둘러 본 ‘아재개그’는 여기까지.‘아재개그’ 삼아 설핏 살펴 본 네 가지의 출전은 다산 정약용이 맏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이다. 다산은 어려운 걸 쉽게, 복잡한 걸 단순하게 ... [2016-12-15](Hit:7464)

3대 교우가족상 받은 추억, 3대 볼링 즐기며 되새겨
1991년 제1회 고대가족상 시상식 때의 모습. 왼쪽에서 세 번째군복을 입은 이가 유태우 교우, 네 번째가 부친 유창진 교우.함께 찾은 볼링장에서 포즈를 취한 삼대의 모습. 가운데 두 명은 유교우의 아들이다.유태우(교육87) 교우삼성증권 반포지점부장PB1986년 대입시험을 마치고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볼링장이었다. 나의 볼링 첫 경험이었다. 그 이후 나는 볼링 매니아가 되었다. 특히 나를 처음 볼링장에 데려가신 아버지, 그리고 나의 두 아들과 함께 3대가 볼링을 즐긴다.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고대를 졸업한 3대 교우가족이다. 올해 수능을 마친 큰아들이나 둘째가 고대에 입학하길 바라는 건 당연한 희망일 것이다.할아버지(故 유달로)는 보성전문 법과25회, 아버지(유창진)는 경영학과 56학번, 나는 교육학과 87학번이다. 흔치 않은 경우이기 때문에 각종 교우회 모임 때 3대 가족임을 이야기하면 선후배들이 나를 쉽게 기억하곤 했다.고대가족상이 제정된 첫 해, 제1회 고대가족상 중 3대 가족상을 받았다. 1991년 5월의 일이다. 나는 같은 해 2월에 졸업한후 ROTC 소위로 임관하였고, 수상 소식을 들었을 당시에는 광주 상무대에서 초군반교육을 받고 있었다. 다행히 5월 5일 행사가 열렸기에 모교에 올 수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후배들과 같이 응원도 했던 즐거운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83년에 돌아가셨기에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2002년에도 상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5인 가족상이었다. 그때는 할머니를 비롯한 15명이 넘는 대가족이 행사에 참석하여 고대가족상 수상을 다함께 기뻐하였다. 할아버지부터 시작한 우리 가족은 고려대와 끈끈하게 묶여 있는 셈이다. 아버지는 3대가 함께 고연전을 가보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셨다. 그래서 지난해 ... [2016-12-13](Hit:7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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