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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관헌의 이용익 선생 사찰기록을 읽고납치<1904년 1월 22일>부터 서거<1907년 2월 24일>까지 치밀한 사찰기록…항일투사의 면모 뚜렷해

등록일 : 2019-07-11 조회 : 8

모교 중앙도서관 앞에 있는 설립자 이용익 선생 흉상(왼쪽). 오른쪽은 ‘이용익 도망실황’이라는 제목으로 극비출국 이후 활동에 대한 일제 사찰기록.

 

김현석(경제55) 고대3·3동지회장이 이용익 선생에 대한 일제 사찰기록을 읽은 소감문을 보내왔다. 3·3동지회는 국가·민족·민주 이념과 자유·정의·진리의 고대 정신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교우모임이다.

 

구한말 나라가 망해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역사기록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반도 병탄을 노리는 일제의 계획은 치밀했고 기록이 철저했다. 이용익 선생을 납치할 때부터 러시아 연해주에서 순국할 때까지의 기록 또한 철저하였다. 이용익 선생이 가는 곳마다 주재국 일본 공사나 무역관장의 육필보고서는 지금 읽어보는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고대3·3동지회가 지난해 이용익 선생 망명지인 연해주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이용익 선생의 외증손자 허종(許鍾) 씨로부터 일제 사찰자료를 얻어 참고하던 중 몇가지 중요 사안을 기록하여 본다.

 

납치 계획부터 실행까지 꼼꼼하게 기록

일제는 1904년 1월 22일 이용익 선생 납치계획부터 1907년 2월 24일 러시아 연해주 라즈돌노예 자택에서 순국할 때까지 선생에 관한 동향보고서를 작성했다.

“한일의정서 체결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용익을 한국 궁정에서 쓸어내야 한다. 이용익은 후에도 반대할 것인즉, 이(李)의 존재는 심히 방해될 것이므로, 차제에 일본에 만유(漫遊) 시켰으면 좋겠다.”

이 전문은 천황, 참모총장, 육군대신, 해군대신에게도 보고됐다. 천황의 동의도 있었다. 선생은 일본 각지의 학교와 산업을 시찰했는데, 다니는 곳마다 현(縣) 지사(知事)의 동향보고서가 상부로 보고됐다.

 

극비 출국과 프랑스·러시아에서의 외교활동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설립 등 교육활동에 전념하던 이용익 선생은 1905년 8월 17일 불어통역관 남필우와 손자 이종호를 데리고(이종호 동행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임) 극비리에 출국했다. 목적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와 러시아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극비리의 탈출로 인천에서 위험천만하게도 목선을 타고 출항했다.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이용익 도망실황’이라며 계속 추적했다.

9월 11일 위해(威海) 발 기선으로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서 9월 13일 이용익 선생은 단발하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 프랑스로 출발하려 했으나, 소지한 금괴와 사금의 통관문제로 지연되어 9월 29일 프랑스 우편선에 승선했다.

10월 31일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철도로 갈아타고 11월 1일 파리에 도착했다. 민영찬 공사를 만나 외교 현안을 논의했다. 독일을 거쳐 12월 1일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그에 도착했다.

 

서거일은 1907년 2월 24일

이용익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일에 몰두했다. 일본 무역사무관의 보고에 의하면 이용익 선생은 1906년 1월에 라즈돌노예에 집을 신축했다. 아마도 헤이그 밀사 파견에 전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정사 이상설은 이미 북간도에서 대기 중이었고, 부사 이준은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집결하였고, 통역으로 활동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그에 있었으므로, 가는 도중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일본 무역사무관의 보고는 밀사로 이용익 선생이 페테르부르그로 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목적과 인적 구성 등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간 이용익 선생의 순국일자가 1907년 1월 12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음력으로, 일본 블라디보스톡 무역관장의 보고에는 양력으로 정확하게 2월 24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는 헤이그 밀사들이 연해주를 출발한 전후의 사정에 참조할 일이다.

김현석(경제55) 고대3·3동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