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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의대 유급생, ‘세계과학기자연맹’회장이 되다
여유있는 말투와 재치있는 농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막힘없이 긴 얘기를 풀어나가는 김 교우의 모습에선 흰 가운을 입은 냉철한 의사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줄 알았는데 그의 손목에 채워진 것은 하루 운동량과 수면시간 등을 기록해 분석해 주는 최신식 헬스케어 웨어러블 디바이스였다. 의학과 사회 트렌드를 융합해 몸소 실현해 보이는 그의 직업은‘의학전문기자’였다. 취미로 신문 읽던 유급생 김철중(의학82) 교우는 모교 의대에 입학해 2년간 유급했다. 아들 3형제 중 누군가는 꼭 의사가 되길 바라셨던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김 교우는 의대에 입학했지만, 학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공부에만 매진해도 어려운 전공 학문은 제쳐두고 연극반에 들어가 활동하며 술과 유희, 사회에 대한 푸념으로 시간을 흘려 보냈다. 낭인같은 삶을 중앙도서관에서 소설과 신문읽기로 보낸 경험은 훗날 김 교우가 기자 활동을 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내가 신문기자로 발길을 돌린 원천은 중앙도서관에 있다”라고 말하는 김 교우는 본과 3학년이 되어서야 전공 공부에 매진했다. 주변에 의사가 된 동기들을 보며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가 발동했기 때문이란다. 학교를 졸업하고 인턴과정을 거쳐 전문의 자격을 딴 김 교우는 군의관으로 입대해 의대 교수를 꿈꿨다. 하지만 군의관 시절 예상치 못하게 생긴 시간적 여유는 오히려 그를 언론 공부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간 김 교우는 언론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입학 인터뷰를 받았다. 당시 언론대학원장은 의사가 찾아온 경우는 처음이라며, 인간적인 충고와 함께 김 교우를 돌려 보냈다. 하지만 결심이 변하지 않고 6개월 후 다시 찾아간 결과 수석으로 입학하는 영광을 안았다. “의대에 있을 때는 장학금을 면제 받더니, 언론대학원에 가서는 입학금을 면제 받았... [2014-03-13](Hit:13065)

예술로 활기찬 서울, 문화로 행복한 시민을 꿈꾸다
2004년 서울특별시가 문화예술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도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설립한 ‘서울문화재단’이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서울시가 설립한 재단 법인으로 4본부 27개의 팀으로 운영되는 서울문화재단은 문화예술 창작 환경을 조성하고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 서비스를 기획하여 서울 시민들의 문화 경쟁력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2012년 3월부터 ‘서울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 재직중인 조선희(독문78) 교우를 만나 서울문화재단의 발전사항과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 들어보았다. 서울문화재단은? 전문 문화예술계를 활성화하고 창작의 수월성을 높이기 위해 ‘예술창작 지원’및 ‘문화예술 보편화 사업’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서울시 산하의 문화예술 기관입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주력하는 사업은? 문화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이러한 지원을 위해선 공모를 받고요, 지원(정기)사업은 일년 중 대부분의 계획이 봄철에 이뤄지기 때문에 접수가 끝나고 현재 심사가 이뤄지는 중요한 시기 입니다. 서울의 문화예술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역할과 직결되기 때문에 최대한 공정하게 이뤄 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 부문별로 무용,음악,연극,시각예술,전통예술,문학,다원예술,일반예술로 나뉘며 그밖에 예술 교육 사업 및 창작공간을 운영하는 사업도 합니다. [2014-02-13](Hit:12822)

<div align=left>공모전 입상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집필한 KUDOS 창립 멤버들이 환히 웃고 있다. 왼쪽부터 차례로 마진용 교우, 김태성 학생, 이혁진 교우.

“열정을 갖고 도전하다 보니 스펙은 저절로 따라왔어요 ”
창설 3년여 만에 총 135개의 공모전에서 입상하고 누적 2억 4000만 원의 상금을 받은 공모전 학회가 있다. 바로 실전마케팅공모전 학회 KUDOS(Korea University Dream Orien ted Society, 이하 쿠도스)의 이야기다. 쿠도스는 2010년 ‘틀을 깨는 사고와 끊임없는 도전으로 실전 마케팅 전문가가 된다’는 비전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최근까지 롯데, 두산, 현대오일뱅크, 외환카드 등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크고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고 있는 명실공히 모교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학회다. 다양한 전공, 입체적인 관점 경영학과 학생들이 대부분인 타 공모전 학회와 달리 26개의 다양한 전공을 가진 학생들이 모인 것이 그들의 차이점이자 공모전 입상의 비결이다. 쿠도스는 공모전을 준비하는 팀을 꾸릴 때, 주어진 과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 할 수 있느냐를 우선 생각한다. 각자의 관점에서 주제에 대해 조사하고 토론하면 생각지도 못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보려 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비전인 ‘틀을 깨는 사고’가 묻어 나오는 듯 했다. 도전하며 성장하는 인생 학회를 만든 계기에 대해 물어보자 학회 창립자 이혁진(영문03) 교우는 우연한 기회에 도전한 공모전에서 느꼈던 쾌감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대학생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를 고민하던 중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그 답을 찾았다고 한다. “강의실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을 친구들과의 토론에서 배우고 전국의 대학생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꼈어요” [2014-02-13](Hit:13343)

<div align=left> 서울고검 집무실에서 만난 조희진 교우.

대한민국 65년 역사상 첫 여성 검사장
예순다섯 해. 1948년에 탄생한 대한민국 검찰에서 첫 여성 검사장이 탄생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모교 법학과 81학번 조희진 교우가 지난해 12월 19일 발표된 검사장급 이상 간부인사에서 서울고검 차장검사에 발탁됨으로서,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금녀의 지위’로 남아있던 곳에 오르게 되었다.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검사장급 직위는 전국 2,000여 명의 검사 중에 오직 49명의 검사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조 교우가 걸어온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에는 ‘여성 1호’라는 수식어가 함께 한다. 법무부 과장,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차장검사, 지청장의 자리에 임명된 첫 여성이 바로 조희진 교우다. ‘유리천장’을 뚫고 ‘여성 1호’타이틀을 독식한 조 교우에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성검사의 길 외롭지만 당당히 걷다 하지만 조 교우는 그러한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성정책 담당관이 되면서 동기들에 비해 4~5년 빨리 과장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그 외로움의 시간이 조 교우에게는 본인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순간이었고, 고민이 거듭될수록 검찰 내,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성이 불모지인 국가기관에서 여성들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선도적인 기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2014-01-15](Hit:12951)

“올해는 내 인생의 특집을 연출할 시기”
14권(단독 저서)의 책을 썼고, 90년대를 평정하는 예능 프로를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최민수, 박명수와 함께 예능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강단에도 섰고, 2장의 앨범을 취입했으며 방송사 사장도 역임했다. 교수님, 작가님, 사장님, PD 등 어떤칭호를 붙여도 그에겐 어색함이 없다. 올해로 입학 40주년을 맞는 주철환(국문74) 교우. 환갑이 된 올해에 직함은 프리랜서다.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이며 보통 남자다. 흔하지 않은 기회를 틈타 햇볕이 따사로운 겨울 어느 날 그를 만났다. “make a difference” “선배님께서 제작하신 프로그램 중 제일 애착이 가는 프로그램은 뭔가요?…”주 교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이런 질문은 좀 그래요. 뭐가 제일. 어떤게 가장. 왜 자꾸 순위를 매기지?… 이런 어법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그래서 다음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기자의 손에 들린 준비해간 질문지 30여개는 대부분‘가장’, ‘제일’, ‘최고로’, ‘하나만’과 같은 순위 매기기식 질문이 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남들은 수학을 풀면서 골머리를 앓고, 또 풀리지 않은 문제를 풀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주 교우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들에 차이를 인정하려 애썼다. 수학을 푸는 대신에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생을 공부했다. 아름다운그대는‘젊은이’ [2014-01-15](Hit:12845)

<div align=left> 이동우 교우(오른쪽 네번째)와 장학생들의 만남은 60년 나이 차이를 넘어 공감 이룬 감동의 자리였다.

“가난하지만 나눌 줄 아는 학생들을 돕고 싶습니다”
지난달 9일(월) 후배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부터 날아온 노신사가 그리운 모교를 찾았다. 그는 바로 미국 철강회사 HI-TECH IRON WORKS의 대표인 이동우(영문53) 교우이다. 2011년 5달란트 장학재단(5 Talents Scholarship Foundation)을 세워 10명의 모교 후배에게 매년 각 5000달러, 총 약 5억여원의 장학금을 전달하는 그가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모교에서 장학생을 만났다. 가난한 유학생활을 딛고 1957년 모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이동우 교우는 수도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중 못다한 공부에 대한 꿈을 이루고자 1970년 도미를 결심한다. 미국에 막 도착한 그의 손에는 당장 몇 달을 버틸 정도의 돈이 전부였고, 교회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지내며 시카고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수업이 끝나면 레스토랑에서 밤 10시까지 일을 한 뒤 밤늦게 공부를 하는 일상을 반복하다 병을 얻기도 했다.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았다가 폐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결핵요양원에 강제로 입원조치를 당하고 이곳에서 나가 학업을 마치고 나면 저같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습니다.” 이후 시카고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뒤 LA로간 그는 1980년 철강플랜트사업을 시작해 HI-TECH IRON WORKS를 굴지의 철강 기업으로 키워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단맛을 본 뒤에는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지만, 이 교우는 자신의 힘겨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결핵요양원에서 했던 결심을 실천했다. 그는 자신처럼 가난과 싸우며 공부하는 후배들을 위해 2011년 성경에서 이름을 딴 5달란트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모교와 서울신학대학 , 한국신학대학, Texas Christian University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 [2014-01-15](Hit:12827)

<div align=left> 문안인사로 아침을 시작하고, 산소를 가꾸며 9년 6개월 째 지내는 백홍빈 교우

윗사람에 대한 공경과 정성은 인간의 기본 도리
백홍빈(수학59) 교우를 만나기 위해 지난 1일(일) 경기 남양주의 일제(一齊)농장을 찾았다. 일제는 한결같다는 뜻으로 백 교우의 호이다. 백 교우는 지난 2004년 6월 1일 시묘살이를 시작해 현재 9년 6개월째이다. 10년을 맞는 2014년 6월 1일까지 산소에 머 물 계획이다. 백 교우는 기자를 불러 산소를 보여주었다. 봉분에는 특이한 둘레석이 있었다. 백 교우는 납골묘를 둘레석으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백 교우는“부모님은 매장된 상태이지만, 앞으로는 화장하기 때문에 납골묘를 이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금 아래에는 아버지 백윤방 씨의 행적과 업적을 새긴 석비가 있다. 백 교우의 부인은“아버님의 삶을 적은 비석은 우리 가족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모래와 비료, 주변의 식물들까지 모두 백 교우의 땀과 손길이 닿아있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다 쓸려 내려가서 산소 주변에 비닐을 덮어야 했다. 또 비가 그치면 썩지 않게 바로 걷어야 한다. 그래서 여름에는 밖에 나갔다가도 비가 오면 얼른 돌아오곤 했다.”지금도 한쪽에는 비료와 모래더미가 보였다. 문안인사로 시작하는 아침 아침이면 백 교우는 산과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다, 산소 뒤의 제단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묘소를 찾아 문안인사를 한다. 9년 반 동안 이어진 일이다. 부모님께는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한다. 이후에는 산소 주변을 살피고, 주변을 가꾸며 지낸다. 이런 생활이 편하지만은 않다. 백 교우의 정강이에는 긁힌 흉터가 많았다. 나무에 걸리고, 긁힌 흔적이다. “누님들은 왜 거기서 고생이냐고 하고, 남들은 청승맞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마음이 편하다.” 처음부터 시묘살이을 위해 산소에서 지낸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03년 11월 백 교우의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후 주변을 정리해 나가다 아예 들어왔다.... [2013-12-16](Hit:13184)

<div align=left> 황현산 교우가 인문학 공동체 '시민행성' 주관 <열린 독서 '홀'> 프로그램에 참석해 독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밤은 낮에 잃은 것을 회복하는 시간”
우리 사회의 일각에는 멘토를 찾는 열풍이 있고, 또 다른 일각에는 선생의 부재에 대한 걱정이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밤이 선생이다》라고 말하는 문학평론가, 황현산(불문65) 교우의 글이 주목 받고 있다. 올해 6월 말에 1쇄를 찍은 이 책은 2013년 11월 말 현재 8쇄, 1만 이천 부가 독자들과 만났다. 상당수의 책이 1쇄조차도 판매되지 않는 출판계의 현실에서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이러한 현상을“홍상수 감독의 영화(독립영화)가 백만 관객을 동원한 격”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도서출판 난다의 김민정(시인)편집자는 본보와의 통화에서“《밤이 선생이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특이한 사례라고 하면서, 문인들이 먼저 열광했고, 일반인들이 문인들의 열광에 호기심을 보이며 책을 구입했다”고 전했다. 가장 유행에 민감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잡지 씨네21과 패션잡지 GQ코리아에서도《밤이 선생이다》를 기사화 했으며, GQ코리아에서 선정한‘2013년 올해의 남자’에 황 교우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또한 황 교우는작년에‘젊은작가포럼’이 선정한‘제11회 아름다운 작가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젊은 문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문학평론가다. 밤에 깨어있는 사람들 지난달 25일 시민행성 주관의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황현산 교우가 독자들과 만났다. 황 교우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보여주듯, 백여 명의 독자들이 보조석까지 가득 채웠다. 황 교우는 독자들과의 대화에 앞서‘밤에 깨어있는 정신’이라는 주제로 짧은 강연을 진행했다. 황 교우는 괴테의 에 나오는“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문장을 인용하며,“낮에 잃은 것은 이성과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 너머의 것”이라고 설명하며“밤은 낮에 잃은 것을 밤의 몽상을 통해서 일종의 계시의 형태로 회복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황 교우는“문학에서는 언제나 어둠... [2013-12-16](Hit:12831)

“우리는 사다리 역할만 했어”
이과대 60주년 행사가 끝난 후 만찬장에서 김우갑(생물53) 교우를 만났다. 김 교우는 지난 1953년 생물학과에 1회로 입학했고, 1964년부터 99년까지 모교 생물학과 교수로 재임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후배 명예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 교우에게 입학 당시를 물었다. 그는 지금도 6.25 전쟁 당시 임시교사 주소인 ‘대구시 원대동 1164 번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꿈을 품고 모교를 선택했을까. 김 교우는 “이런 데서 거창한 이야기를 하면 모두 거짓말”이라며 “우리는 사다리 역할”이라고 말했다. 1953년은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해이다. 나라 밖에선 생물학 분야의 혁명이 한창이던 때, 대한민국엔 가난과 전쟁만이 있었다. 생물학과이지만, 변변한 교과서도 없었다. 김 교우는 “국내 어느 학교에도 교과서라는 것이 없었다”며 “교수가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불러주면 복사기마냥 옮겨 적는 게 공부였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60년, 대한민국은 과거 과학계를 이끌던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김 교우와 같은 선배 과학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김 교우는 64년 모교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9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과학자로, 부총장으로 ‘사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김 교우가 60년 후배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지금의 이과대를 있게 한 선배와 앞으로의 이과대를 만들어갈 후배이다. 그는 이과대가 어떤 미래를 만나길바랄까. 김 교우는 “나는 건강, 가족, 그 다음이 사랑하는 고대야”라고 말한다. 그에게 세 번째인 모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다. [2013-11-18](Hit:12708)

<DIV ALIGN=LEFT>변상은 교우(사진 왼쪽)와 정지윤 교우.

“군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싶다”
이날의 행사에는 6군단에서 근무하는 모교 출신의 현역 장교 10여 명도 참석했다. 그중에 모교 최초의 여성 학군장교후보생(ROTC)인 변상은 소위(체교09)와 정지윤 소위(체교09)도 있었다. 모교 학군단은 2011년에 여성 후보생을 받기 시작했으며, 변 교우와 정 교우는 모교 최초의 여후보생 다섯 명 중 두 명이다. 변 교우는 여성 학군장교 모집 공고를 보고 “이것이야말로 내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군단사령부 병인사장교인 변 교우는 “병사 개인의 적성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만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했다. 군인이 되는 것이 어린 시절의 꿈이었고,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는 정 교우는 신병교육대의 소대장이다. 정 교우는 상상했던 군 생활과 실제 군 생활 사이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상상할 때는) 소대장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의 소대장은 상급지휘관의 명령을 수행하는 동시에 부하들을 관리하는 중간관리자라는 점에서 차이를 느꼈다”고 대답했다. 남성이 절대다수인 조직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차별이나 불편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요즘의 군대에는 그러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후보생 시절에 대해 질문하자 변 교우는 사격을 처음 할 때 재미있던 기억을, 정 교우는 견딜 수 없이 추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변 교우와 정 교우 모두 군 생활을 해나갈수록 “정신력이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하면서, “돋보이는 개인이 되기보다는 조직과 잘 융화되는 군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2013-11-18](Hit:1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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