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함께하는 고대교우회

Home > 교우회보 > 인터뷰

인터뷰

<div align=left>40년 동안 쌓은 대학교육자이자 행정가로서의 경험을 세종부총장 직을 통해 쏟아내겠다는 조홍연 부총장.

세종캠퍼스 제2창학을 위한 퀀텀 점프!
조홍연(식공69) 모교 제14대 세종부총장은 지난 3월 17일 취임해 부총장으로서 첫 학기를 보냈다. 조 부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세종캠퍼스 제2창학’을위한 실천 정신인 ‘퀀텀점프QuantumJump’를 내세웠다. “퀀텀 점프란 세종캠퍼스 구성원들이 추구해야하는 마음 자세이자 우리 대학 발전을 위한 채찍입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경쟁 심화, 구조개혁, 정원감축 등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난관 극복을 위한 노력이 경쟁 대학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타 대학의 발전속도를 추월할 수 없습니다. 타대학이 1계단 발전할 때 우리는 100계단 도약해야 하고, 그래야 일류 대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신을 퀀텀 점프라는 말에 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획기적인 발전이 요구되며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성화를 통해 미래융합캠퍼스로 조 부총장은 세종캠퍼스의 현 상태를 ‘일시침체’로 진단했다. [2015-07-17](Hit:12670)
“오직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아, 꿈에도 잊지 못할 1944년 1월 31일 우리 학도병 모두의 마음이 착잡했던 그날의 밤이여. 우리들이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탄 것이 그 날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우리 동지들을 태우고 달리고 있는 이 북행열차는 압록강을 건너 안동을 지나고 청도를 거쳐서, 중국 본토인 양주에 도착했다. 우리 조국강토를 폐허화해가면서 그들의 전쟁전초기지화하고, 우리의 전국학도들마저 최후의 한사람까지도 싹 쓸어서 전지로 끌어갔다. 그때만 해도 일본군이 중국대륙을 의기양양 석권해 들어가고 있을 즈음이다. 하루에 100리나 되는 장정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으니 배가 너무나도 고팠고 조갈이 나서 중국인이 논벌에 마구 퍼다 버린 똥물을 논바닥에 엎드려 먹고 있노라면 일본인 병사가 내 궁둥이를 걷어차면서 제지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 물을 마시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나도 모르게 마셨다. [2015-06-15] (Hit:12471)

해방조국을 염원했던 학도병, 민족사학 품에 안기다
1909년생, 올해 나이 107세. 인터뷰 요청차 전화했을 때 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리던 임용목 교우의 목소리는 나이가 의심될 정도로 정정했다. 임 교우의 이력은 107이란 숫자만큼이나 특별하다. 일제감정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산전수전을 겪었다. 역사의 산증인으로 학도병을 대표해 직접 전쟁수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기적적으로맞은 조국 해방 1년 만에 조국 품으로 임용목 교우는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 전선으로 끌려갔다. 죽음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그곳에서 임 교우의 분노는 커져갔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가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모두가 잠자고 있던 어느 날 아침, 허공에 대고 막사에 총을 갈겼지. 그렇게 총살당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해방 소식이 들려온 거야”사고를 조금만 일찍쳤다면 자신은 그대로 죽었을 것이라며 그는 껄껄 웃었다. 해방 뒤 조선 학도병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아무런 연고 없는 중국 땅에서 조국이 자신들을 불러주길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다. 참다못한 임 교우는 직접 동료들은 이끌고 상해행 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1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1946년 6월의 일이었다. [2015-06-15](Hit:12671)

인터뷰 - 김면중(철학57) 4월혁명고대 회장
올해는 4.18 55주년이 되는 해다. 젊은이들에겐 역사적 사실로 다가오지만, 4월혁명고대 김면중(철학57) 회장에게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1960년 4월 18일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학생들이 대운동장에 모였어요. 시국에 대해 토론을 펼치다 그대로 정문을 박차고 나갔어요” 김 교우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55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선두 대열에 있었다. 국회의사당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길, 종로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의 습격을 당했다. 분기에 찬 고대생들은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머리를 다쳐 의식을 잃고 쓰러졌어요. 눈을 떠보니 반도병원에 누워있었습니다” 김 교우는 9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졌고 1년 넘게 휴학해야 했다. 하지만 김 교우를 비롯한 고대생들의 희생으로 혁명의 분위기는 고조됐고, 다음날 4.19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4월혁명고대는 4.18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09년에 창립했다. 이기택(상학57) 초대회장에 이어 김면중 교우가 2대 회장이다. 그는 재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 세대를 보면 개인주의가 팽배해졌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웃이 잘 살아야 나도 잘 살 수 있다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선배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듯, 후배들도 옳은 일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요즘 김면중 교우와 4월혁명고대는 새로운 4.18기념탑 건립 논의가 주된 이슈라고 한다. 김 교우는 새 기념비를 통해 4.18의 기억이 후배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밝혔다. 4월혁명고대는 종로구 신설동에 있는 사무실을 통해 4.18세대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라는 제목의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다. [2015-04-14](Hit:12663)

<div align=left>강위동 교우의 후원으로 무료급식소는 22년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따뜻한 밥 한 끼로 허기와 외로움을 달래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종로 탑골공원을 찾아가곤 한다. 3·1운동 당시 대한독립만세 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 학생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팔각정, 민족의 패기와 혈기를 발산하던 이 공간이 이제는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버렸다. 공원 뒤편에 있는 무료급식소에 배식 봉사를 하러 발걸음을 옮긴다. 공원 담벼락을 끼고 서있는 쓸쓸한 노인들의 긴 줄을 지나 무료급식소로 들어서 배식을 준비하는데, 귀를 의심하게 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22년 간 자리를 지켜왔던 무료급식소가 문을 닫는다고 한다. 급식소가 사라진 자리에는 카페가 들어온단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원각 복지회에서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강위동(경연27회)교우의 이야기다. 무료 급식을 도맡아 운영해오던 보리스님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급식소로 운영되던 장소도 새 세입자에게 넘어갈 위기에 닥쳤다. 하지만 강 교우가 원각사 건물에 대한 계약을 새로 체결하면서 무료급식이 재개됐다. “무료 급식소 운영을 하려고 건물 계약을 새로 하려니까 위약금도 물어내라 그러고 심지어 건물주는 세를 올리려고 하더라고요. 아마 고대출신이면 안 그랬을텐데(웃음)” 강 교우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데 드는 비용은 한 달에 약 1500만원, 하루에 약 150명~200명의 노인들이 이곳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한다. 재정적인 후원은 강 교우가 그대로 이어나가더라도 배식을 하는 봉사단체들은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다. “한 달에 30~40개의 봉사단체들이 돌아가면서 하루씩 배식을 맡아주어야 해요. 교우회에서도 봉사활동 하러 와도 참 괜찮을 것 같아요.” 원각사 무료급식소의 운영을 위해 강 교우는 심곡암의 주지스님인 원경스님에게 찾아갔다. 10년 동안의 인연이 있는 원경스님이 흔쾌히 실무를 맡아주기로 하면서 무료급식소는 부활의 첫걸음을 걸을... [2015-04-14](Hit:12747)

장학사업으로 후배 지원하는 교우회 만들 것
경상대교우회 창립 의의는? 경상대교우회가 지난 35년간 세종캠퍼스의 대표 단과대학으로서의 역할과 비중을 보면 다소 출범이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 교우회 창립을 계기로 교우들의 구심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교우회를 통하여 모교의 발전적 지원과 교우들간의 친목도모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교우회 창립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모두 바쁜 사회생활로 인하여 회합을 갖기도 어려웠고, 임원 선출에도 여러 가지 사유로 고사를 하였으나 그래도 교우회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참여해주신 모든분들에게 감사하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경상대교우회 창립에 힘써주신 강병구 학장과 정균화 교수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15-02-15](Hit:12581)

다차원 분광학 권위자, 모교에 1000억원 연구비 유치하다
지난해 12월, 모교 화학과 조민행 교수가 기초과학연구원(Institute for Basic Science, 이하 IBS) 외부연구단의 새연구단장으로 선정됐다. IBS는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 인프라 육성을 위해 이명박(경영61) 대통령 시절인 2011년에 설립됐다.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연구기관으로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정책의 핵심기관이다. 조민행 교수가 새 단장에 선정된 외부연구단은 IBS로부터 연간 최대 100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순조롭게 연구가 진행된다면 모교는 향후 10년간, 합계 1000억 원의 연구비를 국가로부터 지원받게 된다. 조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다차원 분광학’연구를 개척한 이 분야의 권위자다. 외부연구단 선정을 위해 IBS는 후보들의 연구실적과 리더십을 종합적으로 평가했고, 다른 대학과 치열한 경쟁 끝에 조 교수를 앞세운 모교가 외부연구단을 최종 유치했다. 조민행 교수는 모교에 ‘분자 분광학 및 동력학 연구단’을 설립해 펨토초(1천조분의 1초) 단위의 다차원 분광학을 활용한 분자구조규명 연구에 도전한다. [2015-02-13](Hit:12807)

<div align=left>역우회의 축하 플래카드 앞에 선 김용구 교우(왼쪽).

화제의 교우 - 마라톤 풀코스 500회 완주 김용구(철학73) 교우
마라톤은 42.195km라는 긴 경주 거리 탓에 일반인에게는 완주하는 것조차 힘든 종목으로 꼽힌다. 극한 지구력을 요구하는 이 종목에서 60대의 나이로 통산 500번 완주를 달성한 교우가 있다. 김용구(철학73) 교우가 그 주인공이다. 김 교우는 지난달 23일 서울 잠실벌에서 열린 YTN 손기정 평화 마라톤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 완주 통산 500회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현재 국내에서 마라톤 풀코스 완주 500회 기록을 보유한 사람은 김 교우를 포함해 단 8명이다. 김 교우가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2004년이다. 10년 전 당시 침체기에 빠진 사업 때문에 방황하던 김 교우는 지인에게 “마라톤을 해보는게 어떻겠느냐”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우연찮게 하프 마라톤을 한 번 뛰어본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 모교 교우들의 존재도 큰 힘이다. 매주 마라톤을 함께 뛰고 있는 교우에서부터 마라톤을 사랑하는 교우들이 결성해 활동했던 고대 마라톤 클럽, 그리고 재학시절 했던 역도부 활동은 김 교우가 500번 마라톤을 출전해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이 완주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김 교우는 2004년 첫 출전부터 매 경기 자신의 등번호 패치와 옷핀을 모으고 있다. 땀에 절은 등번호 패치와 녹슨 옷핀들을 보며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만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김 교우의 다음 목표는 2018년 손기정 마라톤 대회에서 통산 1000번째 마라톤 완주를 하는 것이다. 체력 관리를 위해 매주 세번씩 훈련도 하고 있다. 나이를 잊은 김 교우의 끊임없는 열정과 도전이 앞으로도 이어지길 기원한다. [2014-12-15](Hit:12756)

<div align=left>“시는 힘없는 자들에 대한 희망의 주술”이라고 말하는 박정대 교우.

주문처럼 중얼거리는“체 게바라 만세”
“글쎄요. ‘시’는 ‘라’다음에 오는것이기도 하고 ‘도’이전에 오는것이기도 하겠지요.”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박정대(국문84) 시인의 답이다. 유쾌하다. 방심할 뻔했다. 박 교우는 2014년에‘체 게바라’를 외친 사람이다. 그는 올해 라는 시집으로 제22회 대산문학상 시부문을 수상했다. 대산문학상은 대산문화재단에서 최근 1년 동안 발표된 단행본 중 작품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여 시상하는 상으로 1993년 제정됐다. 10월 28일 박 교우는 대산문학상 관계자의 전화를 받았다. “직장에서 퇴근한 후에 글을 쓰려고 옷을 갈아입고 책상에 앉았는데 낯선 전화번호가 계속 뜨더라고요. 계속 전화가 오길래 귀찮아서 받았더니 다짜고짜‘여보세요, 저 시인 곽효환인데요. 저 아시죠?’하길래 ‘아, 시는 읽어 봤어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제가 왜 전화 드린지는 아시는거죠?’라는 거예요. 속으로 ‘헐, 내가 어찌알아.’했죠.” ‘수상소식을 듣고 한동안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통화를 마치고 박 교우가 글로 남긴 소감 ‘고요히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의 일부다. 그는 ‘어두운 밤길을 가는 외로운 영혼들과 함께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시’를 쓰고싶다고 적었다. 또한 그는 ‘이제 가까스로 시작하려 한다’고 썼다. “제가 시를 쓴 게 아니라, 중학교 2학년때쯤 시가 저를 찾아왔다”고 말한 시인이 말이다. 시가 그를 찾아온지 35년이 됐다. [2014-12-15](Hit:12814)

<div align=left>54개국 130개 세종학당이 표시된 세계전도를 배경으로 세종학당 교재《세종한국어》를 들고 있는 송향근 교우.

한국어·한국문화 세계화의 중심, 해가 지지 않는 세종학당
“세종학당은 정부가 운영하는 외국인 대상 한국어·한국문화 교육기관입니다. 2012년 10월 24일 출범해 곧 두돌을 맞이하는 세종학당재단은 현재 전 세계 54개국에 130개소의 세종학당을 지정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해가 지지 않는 학당’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7층에 있는 송향근(국문76) 세종학당 재단 이사장실 벽면에는 130개소 세종학당이 표시된 세계전도가 걸려 있다. 송향근 이사장은 인터뷰 도중 자주 세계전도를 가리키며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가 잠든 시간에도 세계 어디선가는 세종학당에서 한국어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송 이사장의 표현처럼‘해가 지지 않는학당’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에만 3만 6000여명 교육 전 세계 세종학당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운 학생 수는 지난해에만 3만6000여 명이다. 2007년 세종학당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와 비교해 학당 수는 10배, 학생 수는 48배 가량 늘어났다고 한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어 학습 수요가 늘어나 정부는 한국어 세계화 추진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교육하는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던 세종학당은 민간법인 한국어세계화재단에 위탁되었다가 2011년 법정재단으로 확대 개편됐다. 송 교우는 한국어세계화재단 이사장을 거쳐 세종학당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어 세계화의 주역으로 활동해 오고 있다. [2014-10-16](Hit:13032)
다음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