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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변호사 허헌, 제국주의 사법체계를 뒤흔들다3·1운동 100주년의 해에 되돌아 본 허헌의 ‘공소불수리’론

등록일 : 2019-05-13 조회 : 194

‘독립선언사건 48인 공소불수리 판결’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 1920년 8월 10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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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전법과 1회 졸업생 허헌 교우.

 

보전1회 허헌, 민족대표 48인 변론 맡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독립운동사·사회문화사·국제정치사 등의 시각에서 3·1운동의 의미는 그야말로 묵직하다. 그 사건의 중심부에 보성전문 학교(이하 ‘보전’)가 있었다. 1910년 이래 보전 경영자 손병희는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했고, 독립선언서는 보성사(보전 부속출판사)에서 인쇄했으며,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시위를 주도한 학생대표 강기덕은 보전 법과 재학생이었고, 보전 교장 윤익선은 ‘조선독립신문’을 제작하여 3·1운 동의 뜻을 대중 속에 전파하였다.
3·1운동 이후 수많은 재판들이 있었지 만, 민족대표를 포함하여 주도자 48명에 대한 재판(이하 ‘대상사안’)이 특히 국내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 재판의 변호사 그룹에서도 보전이 돋보였다. 허헌(법과 제1회), 정구창(법과 제2회), 박승빈(후에 교 장 ) 이 그 들 이 다 . 그 중 허헌(許憲 : 1885~1951)은 그 재판 과정에서 스타로 이름을 떨쳤다. 사실 허헌은 그 전부터 이미 이름을 얻었지만 1919년 재판과정에서의 활약은 그야말로 역사적 사건이었다.

 

3.1운동에 내란죄 적용하려던 일제
1919년 재판 당시 법원구조는 지방법원 (전국 주요도시), 복심(覆審)법원(경성· 평양·대구), 고등법원(경성)으로 구성된 3심급 체계였다.
검찰은 대상사안을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했다. 예심판사는 해당 사안을 내란죄(형법 제77조)로 판단하여 (지방법원이 아닌) 고등법원으로 회부한다. 당시 법은 내란죄에 대한 신속·종국적 대처를 위하여 이를 최고법원의 전속관할로 규정하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을 접수한 고등법원 예심판사는 아래와 같이 결정한다.


주문: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 판소로 지정함.
이유: ... 내란 교사죄가 성립함에는 폭동을 수단으로 정부를 전복하거나 국토를 참절하며 기타 조헌(朝憲)을 문란케 할 목적을 달성할 것을 교사하는 행위가 있을 것을 요한다. 때문에 단지 “조선 민족된 자는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여 서로서로 분기하여 제국의 기반(羈絆)을 벗어나 조선독립을 도모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격려·고무함에 그치고 특별히 폭동을 수단으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것을 교사하였음이 아닐 때에는 비록 그 격려·고무로 인하여 간혹 폭동을 수단으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는 거동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 라도 그것은 전혀 그 자의 자발적 의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위의 격려·고무한 자에게 내란죄의 교사를 했다고 할 수는 없다... 본건은 ... 보안법, 출판법...의 죄에 해당하며, 지방법원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 므로...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 소로 지정하여 사건을 동 법원에 송치함이 타당하다고 여겨 주문과 같이 결정하는 것이다.


내란죄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보안 법·출판법 위반의 죄에 해당하니 지방법 원에서 재판하라는 것이다. 위 결정에 따라 1920년 7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첫 공판이 개시되었다.

 

재판부의 허를 찌른 ‘공소불수리’론
그러던 중 1920년 7월 16일 제5회 공판에서 허헌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매우 예리한 논리를 전개한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 다: 고등법원 예심판사의 결정서 주문(主 文)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 소로 지정함”이라고만 할 뿐 “본건을 경성지방법원에 송치함”이라는 명문이 없다. 따라서 본건은 아직 고등법원에 계속 (繫屬)중이다. 따라서 관할지정을 받았을뿐 송치를 받지 못한 본안을 경성지방법 원에서 심리하는 것은 위법하다. 따라서 경성지방법원은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해야 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법원은 각하 판결을 해야 한다. 대상사안은 재판을 위한 형식 요건을 결한 것이어서 실질에 대한 판단의 대상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검사는, 예심결정서는 주문(主文)과 이유(理由) 를 종합해서 해석해야 하며, 고등법원 예심결정서에 이유 부분에는 ‘송치’라는 문구가 있음을 들어 허헌의 주장을 반박했 다. 이에 대해 허헌은, 사건의 이송 여부는 주문으로 판단함이 종래 관례이며 법조계의 정평이라고 재반박했다. 즉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주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대상사안에서는 내란죄가 문제되지 않으므로 고등법원에도 재판관할권이 없고, 예심결정서에 따를 때 경성지방법원에도 재판권이 없으므로 피고인들을 모두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헌의 주장은 그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재판정에 운집한 방청객들이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재판부와 검사의 당황한 모습은 결과를 예상하기에 충분했다. 1920 년 7월 17일 공판이 재개되었다. 검찰과 허헌 사이에 공방이 오갔지만 변호인 측의 승기는 여전했다. 드디어 1920년 8월 9 일 재판장은 판결 주문을 낭독한다. “본건 공소는 이를 수리하지 아니한다.” 허헌의 승리는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이를 바라보던 조선 민중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3·1운동의 뜨거 움을 다시 경험했을 것이다.
제국주의 사법 메커니즘이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했다. 검찰은 항소했다. 경성복 심법원은 원심인 경성지방법원의 원심판 결을 번복했는데, 그 이유는 원심에서 검사의 주장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경성 복심법원은 대상사안에 대하여 스스로 재판권이 있다는 전제 아래 본안 판단(즉 출판법, 언론법 등의 위반 여부)을 했다. 제1 심법원이 법적 판단을 하였다면 제2심법 원은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여담이지만, 그 상황에서 법의 시각에 엄격했던 제1심법원 재판장(立川 판사)의 법률가적 소양도 눈여겨 볼 일이다.

 

민족변호사의 탄생과 보전 법학교육
허헌의 예리하고 창의적인 법리 주장은 제국주의 사법의 권위를 크게 흔들었다.
경성복심법원이 원심 판결을 취소했지만, 선고 형량이 이례적으로 낮아 손병희·최 린·한용운 등에 대한 3년 징역형이 최고 형이었다. 공소불수리 사건이 피고인들에 대한 처벌 명분을 격감시킨 것이다. 보전은 국권이 위태롭던 시기에 어렵게 시작한 학교였지만 제1회 졸업생 허헌은 현실 에서 ‘교육구국’의 이념을 몸으로 보여주 었다. 1905년부터 보전이 법과를 설치하여 법률가를 양성한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공소불수리 사건은 다른 변호사들에게 식민지의 법정에서도 독립운동을 할 수있다는 자극을 주었다. 그때부터 허헌은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허헌은 김병로(金炳魯), 이인(李仁)과 함께 일제 강점기 3대 민족인권변호사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3인 중 김병로 또한 보전 사람 (강사·촉탁강사·재단이사)이고 보면 고대인에게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허헌은 보전 교장, 조선인변호사회 회장, 동아일보 사장직무대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광복 이후에는 여운형·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 원회 결성에 참여하는 등 진보적 입장에 섰고, 1948년 이후 북으로 건너가 정착하 였다. 북한에서 허헌은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허헌은 그의 업적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한 이념적 무기로써 사회주의를 선택하여 치열하게 활동했던 고려대 교우들이 적지 않다.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그들을 적극 발굴하고 바르게 평가하는 사업도 서둘렀으면 한다. 일제강점기 보전은 일제의 관학(경성제국대학)과 달리 우익과 좌익이 어우러진 혁신적인 자유주의의 온상 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품어야 할 대한 민국 역사의 다채로운 모습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 정도는 넉넉하게 품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
1920년 보전 졸업생은 11명에 불과했 다. 많은 학생들이 3·1운동으로 인해 퇴학·구속당한 결과이다. 100년 전 보전은 3·1운동을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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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순구(법학81)

모교 법학전문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