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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지성사의 보고<寶庫> 《개벽》 편집인 차상찬, 전집으로 만나다

등록일 : 2019-06-11 조회 : 44

정현숙 전집편찬위원장(오른쪽)이 《차상찬 전집》 출판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왼쪽은 차상찬 선생의 종손(從孫) 차기태 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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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찬 전집》 1~3

차상찬전집편찬위원회 편 / 청오차상찬기념

사업회 / 비매품

 

“한 30여년 전이었던가, 대여섯 사람이 모여 방담(放談)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일제 때의 잡지인 중에서 한 사람을 내세운 다면 누구일까?’ 라는 화두를 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왈가왈부가 있게 마련인데, 좌중이 하나같이 ‘그야 차상찬이지…’하고 입을 모은 일이 있다. 차상찬의 이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한국 잡지계에는 언제부터인지 차상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단편적이나마 전설처럼 흘러 왔던 것이 사실이다.”-최덕교 편저,《한국 잡지백년》(제2권), 현암사, 2004, 24쪽.

한국 잡지계의 전설, 일제 강점기 최고 잡지인으로 추앙을 받는 차상찬(보전법 과6회, 1887-1946) 교우의 전집 1차분 전 3권이 간행됐다. 이번에 간행된 전집은 차상찬 교우가 1920년 창간 동인으로 참여해 이후 편집인, 발행인을 맡았던 종합 월간지《개벽》에 실린 글을 모았다. 전집은 차상찬 교우의 고향인 강원도 춘천의 학자, 언론인, 향토사학자 등이 결성한 청오 차상찬기념사업회(이사장=김중석 강원 도민일보 사장)에서 간행했다. 전집 편찬 위원장 정현숙 한림대 연구교수를 춘천에서 만나 편찬과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차상찬 교우의 종손(從孫)인 차기태(정외 77) 교우가 춘천 취재에 동행했다.

 

발로 뛰며 기록한 100년 전 한반도 풍속지리

정현숙 교수는 현대문학 전공자로 잡지 연구를 수행했다. 일제강점기 잡지 중 가장 중요한《개벽》을 읽다보니 차상찬이라는 이름이 굉장히 많이 나왔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궁금하던 차에 춘천시에서 차상찬 선양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차상찬 관련 자료는 언론뿐만 아니라 민속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어서 이에 대한 기초자료 조사가 먼저 이뤄져야 제대로 선양사업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강원도와 춘천시, 김금분 전 도의원 등으로부터 연구비 1억5000만원을 지원받아 자료조사와 학술대회 등을 개최했고, 전집 출간까지 할 수 있었다.

“이번 전집에는《개벽》에 실린 차상찬의 글을 모았어요. 가장 큰 어려움은 필명 확인과《개벽》의 판본 문제였습니다. 차상찬은 청오(靑吾)를 비롯해 48종의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했고 추가로 20여 종을 검증하고 있어요. 필명 혹은 무기명 기사 중 필자가 차상찬이 분명한 경우만 수록했는데 전집 간행 후에 발견된 글도 있어 나중에 추가해야 합니다.《개벽》은 일제에 의해 발매 금지되면 호외 혹은 임시호를 발행하며 검열에 맞섰는데 이 판본들 대조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개벽》은 3.1운동 후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인 1920년 6월 창간해 1926년 8월까지 6년 3개월 동안 모두 72호를 발행했다.

창간호에 실린 차상찬 교우의 한시가 삭제되고 수차례의 발매금지, 정간, 벌금 등혹독한 시련 끝에 1926년 강제 폐간됐다.

차상찬 교우는 1934년 11월《개벽》을 속간했지만 4호까지 발행 후 재정난으로 폐간했다. 속간된 4권의 차상찬 글도 이번 전집에 수록됐다.

“전집 1권과 2권은 1923년 2월부터 1925년 11월까지 3년에 걸쳐《개벽》에 연재한 ‘조선문화의 기본조사’ 중 차상찬의 글을 수록했습니다. 당시 개벽사에서는 ‘조선 사람이 조선을 모르는 건 있을 수 없다’라는 취지로 전국을 직접 답사하고 13개도를 ‘도호(道號)’로 간행했는데 그 중 11개도를 차상찬이 답사했습니다. 각 지역의 지리, 경제, 인물, 명승지 등을 사실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검열을 피하면서 실제론 일제하 조선의 현실을 드러내고 당시 군수들의 친일 행위에 대한 풍자도 담고 있어요. 전집 3권은 그 외의 글을 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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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춘천교우회장(가운데)은 차상찬 동상 건립기금을 낸 데 이어 ‘차상찬 문고’ 전시공간을 조성했다. 춘천시내 복합문화공간 ‘데미안 책방’에 마련된 ‘차상찬 문고’ 앞에 선 김현식 회장과 교우들.

 

정현숙 교수는 ‘차상찬은 고증을 중요하게 생각한 문필가’라고 강조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에서 덕수궁의 내력에 대한 설명이 오류가 많은데 차상찬의 글이 가장 정확하다고 말했다. 심경호 모교 한문학과 교수는 ‘김삿 갓의 한시’를 연구하면서 차상찬이《개벽》에서 가장 먼저 이를 수집하고 의미 있는 논설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차상찬 교우가 주도한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100년 전 한반도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학자, 민속학자 등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진 글을 모두 모으면 차상찬 전집은 전10권 이상의 분량이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집편찬위원회는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번 전집 1차분은《개벽》원문을 그대로 게재했다. 한문 표기는 물론 오탈자도 그대로 게재하고 주석으로 이를 보완했다.

연구자들을 위한 책으로 제작한 것이다.

500권을 비매품으로 인쇄해 200여 곳의 국공립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춘천교우들, 동상 건립하고 ‘차상찬 문고’ 운영

차상찬 교우는 1887년 춘천에서 태어나 1913년 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 후 모교에서 강사를 지냈다. 1919년 천도교청년회에 참여해 개벽사를 창립하는 데 앞장섰다.

《개벽》은 천도교청년회에서 간행했지만 종교적 색채보다는 사상, 시사, 문화 등 종합잡지의 성격이 강했다. 천도교가 보성 전문학교를 경영한 영향으로《개벽》은 보전 교우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창간 당시 편집국장 겸 주간은 김기전(보전법과10회) 교우였고, 차상찬과 함께 방정환 (1918년 보전법과 입학, 3.1운동으로 중퇴)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들 외에도 변영만(보전법과2회), 장도빈(보전법과4회), 한기악(보전법과10회)을 비롯해 많은 교우 및 보전강사가 필자로 참여했다.

이 중 차상찬 교우는 개벽사를 이끌어온 중심인물이었다. 개벽사의 창립회원으로서 정경부 주임, 편집국장, 발행인, 주간 등을 맡으며《개벽》뿐만 아니라 ‘부인’, ‘신여성’, ‘어린이’, ‘별건곤’, ‘혜성’, ‘제일선’, ‘학생’, ‘신경제’ 등 다양한 잡지의 발행을 주도했다. 차 교우는 개벽사 발행 잡지 외에도 당시 다양한 매체에 활발하게 글을 발표한 문필가였다. 한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고, 언론인이자 민속학자, 역사가였다.

정현숙 교수는 “서구적인 장르 분류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했다.

차상찬 교우는 ‘천도교회월보’ 초대 주간과 사장을 지낸 형 차상학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차상학 선생은 1918년 작고했는데, 차상찬 교우는 형의 뒤를 이어 언론출판인이자 문필가의 길에 들어섰다. 춘천 취재에 동행한 차기태 교우는 차상학 선생의 손자이다. 차기태 교우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한겨레신문사 창간 당시 기자로 들어가 언론인이 됐다.

현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으로 여러 매체에 기명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그리고 돌아 가신 저의 아버지도 강원일보사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었습니다. 이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게 제 글을 열심히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하지 못한 일을 교수님들께서 해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춘천교우회장인 김현식(정외73) 교우는 춘천조각공원에 세워진 차상찬 동상 건립기금을 낸 데 이어 본인이 경영하는 복합문화공간 ‘데미안 책방’에 ‘차상찬 문고’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차상찬 교우가 발행한 잡지들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개벽》은 1920년대에 간행된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로서 우리 지성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를 잇는 매체가 1950년대《사상계》, 1970년대《창작과비평》였다고 할 수있다.《사상계》를 만든 장준하,《창작과비평》를 만든 백낙청에 앞서 우리 지성사에는《개벽》을 만든 차상찬이 있었다. 이번 전집 간행을 계기로 차상찬 교우에 대한 연구가 춘천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길 기대한다.

춘천=전용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