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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명고> 신입 교우 여러분께 부치는 편지
김경훈(농학81) 편집위원CNB저널 편집인고려대학교 제113회 학위수여와 함께 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원이 되신 신입 교우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비록 학위수여식이 취소됐지만 말입니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매우 안타깝습니다.이제 여러분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33만 교우회 일원이 되셨습니다. 지성과 야성을 겸비한 호랑이로 거듭나기 위해 안암의 언덕에서 그동안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누구나 교우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교우가 될 수 없지요.이번 학위수여를 계기로 교우회(校友會)라는 명칭의 의미를 헤아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졸업생들의 친목단체명은 주로 동문회, 동창회가 일반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교우회라는 이름을 쓰는 곳은 모교를 비롯해 보성중고(보성교우회),중앙중고(중앙교우회) 등 몇 곳에 지나지 않습니다.교우는 동창, 동문보다 각별하고 끈끈합니다.캠퍼스에서 맺어진 선후배, 친구의 우정을 영원히 간직한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결속력이 남다르고 유대감이 강합니다. 각종 모임의 활성화는 교우회만의 전통입니다. 일본 와세다대도 우리와 같이 교우회라 표기합니다. 이 대학은 교우회 회장이 총장을 겸하는 독특한 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자랑스러운 교우회 신입 회원 여러분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릴까합니다. 먼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마음을 간직하세요. 모교와 교우회만큼 옛 것을 소중히 승화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곳도 많지 않을 겁니다. 뿌리가 있어야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교우회는 여러분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영원한 안식처이며 마음의 고향입니다.다음, 명불허전(名不虛傳)의 자세를 잊지 마세요. 역시 모교를 나온 사람은 다르다는 걸 보여주면 됩니다. 쌓아온 역량을 꾸밈없이 당당하게 발휘하세요. 교우회는 여러분... [2020-03-18](Hit:17)

대중문화계 고대인을 찾아서 [3] - 집밥처럼 편안한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방송보다는 대중과 직접 만나는 게 좋다는 강인봉 교우는 지금도 전국에서 콘서트를 계속하고 있다. 오른쪽은 ‘자전거 탄 풍경’으로 공연 중인 강 교우.어릴 적, 아버지는 퇴근 무렵 동네 어귀의 레코드 가게로 나를 불러내곤 하셨다. 맘에 드는 판을 골라 들고 집에 와 바늘이 닳도록 들었던 노래가 그룹 ‘작은 별 가족’의 <나의 작은 꿈>이었다. 청아한 목소리와 귀여운 외모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은 별 가족’의 막내 강인봉. 50이 훌쩍 넘은 그를 고대 신방과 84학번 교우라는 이름으로 만나보았다. 반짝이고 화려하던 연예인이 아니라 남다른 삶의 경험이 빚어낸 철학자를 만난 듯 그와의 인터뷰 시간이 흘러갔다. 마치 그가 84학번 입학 30주년 행사를 위해 특별히 만든 곡 <선물 같은 오늘>을 듣는 느낌이랄까.성악을 하신 어머니가 운영하던 음악학원에서 자연스레 악기를 배우게 된 강인봉의 6남 1녀 형제들은 입소문을 타고 여기저기 연주를 다니게 된다. <마징가Z>를 부른 가수들은 많지만 가장 처음 레코딩해서 음반으로 만든 팀이 바로 ‘작은 별 가족’이다. 뭔가를 계획하고 준비해서가 아니라 그냥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들의 음악이 사랑을 받게 됐고, 계속 음반을 내긴 했지만 당시 주된 수입원은 밤무대였다.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 밤무대에서 돈을 번다면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는 가능한 시절이었다.형들처럼 검정고시로 초중고교를 건너뛴 강 교우의 삶에 학교라곤 오로지 고려대학교뿐이었다. 활동하느라 학교생활도 친구도 없던 그에게 모교인 고려대학교는 유일한 마음의 고향인 셈이다. 그가 처음으로 겪었던 학교라는 조직 생활은 본인이 직접 매긴 평점으로는 평균 이상. 군기 세다는 군악대 생활도 엄청난 매를 맞으며 무난히 마쳤다니 이는 그에게서 얼핏 엿보이... [2020-03-18](Hit:14)

고대박물관 소장 걸작선[13] 변시지 ‘까마귀 울 때’ (1980년)
변시지(邊時志, 1926~2013)는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민을 떠나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57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일본 아카데미즘 미술에 기반을 둔 풍경화와 인물좌상을 그리면서 작가활동을 지속했다. 귀국 후에는 고향인 제주도에 정착해, 줄곧 제주도에 머물며 황토색 바탕 위에 검은 필선으로 제주 특유의 거친 풍토와 정서를 담은 작품을 제작했다.‘까마귀 울 때’는 벼랑에 선 높은 소나무, 반쯤 무너진 돌담과 그 위에 앉아 우는 까마귀, 무너질 듯 지붕이 낮은 초가집, 집으로 향하는 구부정한 여인, 구불구불한 길, 멀리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과 어선 등 제주도의 풍토적 예술성이 단색조의 쓸쓸한 정조로 표현된 작품이다. 박유민(한국사98) 모교 박물관 학예사 [2020-03-18](Hit:14)

<자명고> 65세 빌 게이츠의 머릿속
이영미(국문86) 편집위원《마녀체력》 저자빌 게이츠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천재 프로그래머로 이름을 날리며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다. 그 MS에서 만든 윈도우 소프트웨어의 시장 점유율은 90%에 이른다. 젊을 때부터 모은 재산으로 미국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갑부.그런 한창때의 빌 게이츠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나와는 너무 먼 대척점에 있는 잘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65세가 된 그는 어떨까. CEO에서 물러난 지 오래, 아무리 천재라도 몸과 뇌가 노화되고 있을 나이. 그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준 건, 넷플릭스에서 본 <인사이드 빌 게이츠>라는 다큐멘터리였다.3부작으로 만들어진 그 필름은 다양한 기법으로 그의 삶 전반을 훑는다. 화려한 과거의 업적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과연 천하의 부자라도 외모의 노화는 피해갈 수 없는 법. 몸에 살이 붙고, 탈모가 시작되고, 얼굴엔 주름살이 가득했다. 안경다리를 쪽쪽 빨아대는 모습은 옆집 할아버지처럼 천진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 퇴화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노화의 대표적인 증상이 뭔가. 체력이 떨어지고, 호기심이 사라지며, 배움에 게을러지고, 성장의 욕구가 저하되는 것이다. 그런데 65세 빌 게이츠는 밤낮으로 일하던 젊은 시절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테니스를 치며 몸을 관리하고, 다윈처럼 긴 산책을 즐긴다. 아내와 단둘이 카누의 노를 힘차게 저으며 대화를 나눈다. 매일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 집을 나서는 그의 손에는 무거운 에코백이 들려 있다. 그 안에는 늘 대여섯 권 정도의 책이 담긴다. 출장길에 나설 때는 평균 15권을 읽는단다. 대단한 독서가답게 책의 주제 또한 깊고 다양하다. 호숫가 자그마한 서재에서 혼자 일주일 동안 책을 읽으며 ‘생각 주간’을 갖는 루틴은 여전하... [2020-02-18](Hit:40)

대중문화계 고대인을 찾아서 [2] - 연기는 내 운명…철저히 공부하고 준비하는 배우
겨울 오후 햇살이 길게 드리운 삼송동 창릉천 근방, 길고양이를 돌보는 소박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다큐 영화 <시간의 종말>에서의 김대건 신부역할, 삭발 연기를 감행한 <사명대사> 등 삶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배역을 주로 맡아 열연한 배우 황건 교우. 그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이 익다 싶더니 2015년, 고대 개교 110주년 기념 연극 <벚꽃 동산>에서 로빠힌 역을 맡아 굵직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배우 얼굴이 오버랩 된다. 인상 깊게 보았던 그 주연 배우가 지금 내 눈앞에 앉아있다니….고교 2학년 때 연극 <날 보러 와요>를 본 황건 교우는 커튼콜 때 배우들이 서로 뿌듯한 미소를 나누며 자부심과 보람을 보여주는데 푹 반해버렸다. 그때부터 공부는 접어두고 엄청나게 연극을 보러 다녔다. 러시아로 연극유학을 가려고 고대 노문과를 주저 없이 택했고, 입학도 하기 전에 고대극회의 문을 두드렸으며, 졸업 후에는 한예종에서 실기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니 가히 준비된 배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극회에서 연기를 하면서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잠시 배웠고 연주회도 했었다. 당시에는 거의 활싱크만 했지만 후에 <모비딕>이라는 작품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선장 역할을 할 때 큰 도움이 됐단다. 연기에 도움이 되는 문학 수업을 찾아다니며 들었고, 또 태권도부에도 깊이 몸을 담갔다.우즈벡에서 모셔온 그의 아내는 고려인 4세이다. 고려인 3세인 장모님은 타쉬켄트 음악원 첼리스트이셨다. 우즈벡 사람인 장인은 러시아식 아코디언인 바얀이라는 악기를 연주했는데 외모가 다니엘 크레이그를 꼭 닮았단다. 황 교우가 <피터와 늑대>라는 합동공연을 하러 타쉬켄트에 갔을 때, 당시 오케스트라 악장이었던 아내에게 반해 장거리 연애 1년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됐다. ... [2020-02-18](Hit:43)

고대박물관 소장 걸작선[12] 조병덕 ‘저녁 준비’ (1942년)
조병덕(1916~2002)은 서울 출생으로 일본 다이헤이요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에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을 수상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저녁 준비’는 단순 견고한 구도와 성실하고 치밀한 묘사로 조병덕의 초기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두 개의 나무 문기둥 사이에 앉아서 채소 바구니를 무릎 위에 얹어놓고 양파를 다듬는 여인을 포착한 이 그림은 당시에 유행하는 향토적 소재를 다루기는 하였으나 황토색 위주의 전원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흰색과 붉은색, 초록색과 진한 남색의 선명한 대비와 조화가 주는 생동감과 여인의 건강한 아름다움이 당대의 일반적 향토 회화와는 다른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그림 속 여인은 실제 조병덕의 딸을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박유민(한국사98) 모교 박물관 학예사 [2020-02-18](Hit:42)

<자명고> 교우회보 창간 50주년에 부쳐
송수근(영문78) 편집위원장 계원예술대학교 총장2020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언제나 새로운 기대와 감회를 갖게 하지만, 올해는 특별하다. 오는 8월이면 교우회보 창간 5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교우회보는 1970년 8월 5일자로 창간했다. 당시 제호는 <高友會報>였고,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12면으로 8000부를 발행했다. 1984년 현재의 <高大校友會報>로 제호를 변경한 교우회보는 창간 이후 지금까지 고려대 졸업생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 역할을 해왔다. 나는 모교 졸업 후 교우회보라는 든든한 동아줄이 있어 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느낀다. 교우회보의 창간 목적은 곧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하나로 연결하려는 데에 있었다. 1970년 당시 교우들의 최대 관심사는 교우회관 건립이 었다. 당시 2만5000여 교우가 항시 모이고 대화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자 가칭 ‘석탑건립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젊은 교우들은 교우회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교우회보를 창간했다. 교우회보는 단순한 소식지라기보다는 교우들에게 고대 정신을 잃지 않고 고대인다운 품격을 견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한 매개체였다.교우회보 창간 당시를 더듬어 본 것은 50주년의 해를 맞이해 그 근원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데에 있다. 급격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일수록 근원 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새해를 여는 첫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해의 보람을 얻듯이, 창간 정신을 잃지 않아야 고대정신의 공유체로서 교우회보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창간 50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교우회보라는 광장이 더 넓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외형적으로... [2020-01-20](Hit:63)

대중문화계 고대인을 찾아서 [1] - 그는 언제나 현재진행형 청춘으로 산다
한국 드라마 걸작들을 만들어온 김승수 교우의 눈빛은 지금도 형형하다. 오른쪽 사진은 첫 연출작 ‘호랑이 선생님’의 촬영당시(1981.6.)로 배우 조경환(왼쪽)과 김 교우. 그를 보면 ‘紙背를 徹하는 眼光’이 느껴진다. 동그란 안경 너머의 그 눈빛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젊고 재기발랄하며 장난스럽기까지 하지만 상대를 매우 긴장시킬 만큼 강렬하다. 30년 동안 국내 최정상의 인기 드라마들을 만들어왔던 김승수 교우. 전공이었던 독일 희곡, 동아리 활동, 그리고 직업까지, 인생을 통틀어 그를 관통한 한 단어는 오로지 ‘drama’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신입생 시절 가입했던 ‘고대극회’에서부터 그 해에 창립된 독일문화원의 ‘Freie Bühne(자유극단)’ 그리고 ‘MBC 드라마 제작국’. 그가 청춘 이후 거쳐 가며 꿈을 이룬 곳이다.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수많은 연극과 TV 드라마들이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명동 예술 극장에서 초연을 했던 막스 프리쉬의 <만리장성>, 쉴러 작 <군도>, 그리고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까지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이름만 들어도 입이 벌어진다.순수 연극을 하고 싶었던 젊은 김승수는 생계를 위해 MBC에 입사해 TV드라마 연출을 시작한다. 당시 그가 연출했던 <호랑이 선생님>은 최장 어린이 인기 드라마로 아직까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시국이 어수선하던 80년대, 정부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떠난 김승수는 독일 언론을 통해 한국에서는 몰랐던 광주의 현실을 알게 된다. 고교시절, 전혜린을 동경해서 독문학을 선택했고, 또 그녀가 살았던 뮌헨의 슈바빙으로 유학을 떠날 만큼 낭만적이었던 그에게, 그곳에서 접한 국내 소식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드라마를... [2020-01-17](Hit: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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