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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환 교수의 고대유사(高大遺事) (4) - 사라지고 잊혀진 이야기들<br>산 바다 영이 도는 기쁜 이 날에 맞추어 불러보자, 고려대학아!고대 교가의 내력과 정인보 선생

등록일 : 2009-04-13 조회 : 20576

인권환
국문56
모교 명예교수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이렇게 교가가 시작되면 고대인들은 누구나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안암의 언덕에 우뚝 솟은 석탑(石塔)의 위용을 떠올린다. 그리고 스스로 고대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모두 알고 있듯이 현재 불려지는 이 교가는 1955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당시 유진오 총장의 교가 제정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의 신교가다. 실상, 이때까지는 보전(普專)시대의 구교가에서 후렴구인 “보성전문 보성전문 우리 모교 보성전문”만을 “고려대학 고려대학 우리 모교 고려대학”으로 바꾸고 곡은 구교가 그대로 부르고 있었다.

이광수 작사, 김영환 작곡의 구교가가 상세히 알려진 것은 1965년 《高大六十年誌》의 편찬과정에서 찾아낸 보전 법과 18회 졸업앨범(1922~25)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구교가의 작사자 작곡자가 처음 밝혀지고, 그 제정연대도 대략 1923년 경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작사자 이광수에 대하여는 모두 잘 아는 바이지만, 작곡자 김영환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다. 김영환(1893~1978)은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로 최초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숭실중학을 졸업한 후, 선교사로부터 오르간을 배우다가 18세 때 일본에 건너가 동양음악학교를 거쳐 우에노음악학교에 들어가 독일인 숄츠(P.scholz)에게 피아노를 사사(師事)하였다. 귀국해서는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수많은 독주회 반주회를 갖는 한편, 하이페츠, 크라이슬러 등 세계적 음악인들을 초청, 연주회를 개최하여 세계음악의 소개에 큰 공을 세웠다. 1919년에는 홍난파 등과 함께 ‘경성악우회’를 조직 서양음악의 보급에 진력하였는데, 작곡에도 몰두, 보전교가 외에도 중앙중학 교가, 동아일보 사가 등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1962년에 정부로부터 문화포상을 받은 바 있다.

그 후 고대교가는 현 교가 제정 이전에 한번의 큰 곡절을 겪은 일이 있었다. 1950년 봄, 김성수와 현상윤은 새 교가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총장 현상윤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에게 작사를 의뢰하였다. 그 때 가사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교가로 확정되기 전에 6·25 사변이 일어나 전쟁을 겪는 사이, 현상윤과 정인보는 모두 납북이 되고, 학교는 피난 가야 했던 처지가 되면서, 교가 제정은 불발이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이미 일부 알려진 바와 같으나 위당의 가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5년 후인 1955년 영문과 조용만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가사의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위당의 고대교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먼동이 쳐서 트는 이른 종소리 휘영청 넓은 마당 벌써 찼구나. 산 바다 영이 도는 기쁜 이 날에 맞추어 불러보자 고려대학아

(2) 선비들 뜻과 같은 단단한 이룩 백두산 본을 받아 눈보다 희다. 대지의 새 바람 두루 마시며 뜨거운 정성덩이 해 돼 올라라

(3) 다 기운 그 당시에 굄대로 생겨 연해 킨 새 기둥이 오늘을 보니 앞으로 백천만년 길고 길거라. 대 고려 만리 빛을 여기서부터

위당은 3절의 첫 줄에 주를 달고 “고려대학의 전신 보성전문은 고 이용익(李容翊) 씨의 초창한 바니 실로 기울어진 국세를 버티고자 한 의도였는데 지금 와서 신흥의 동량(棟樑)이 되었다”라 쓰고 있다.

<div align=left>위당의 고대교가 친필원고, 아래에 윤이상 선생의 《고대교가에 관하여》란 글이 눈에 띤다. <고대신문 축쇄판 1954년 10월 6일자></div>
위당의 고대교가 친필원고, 아래에 윤이상 선생의 《고대교가에 관하여》란 글이 눈에 띤다. <고대신문 축쇄판 1954년 10월 6일자>


위의 가사는 필자가 원문의 구철자법과 위당 특유의 고유어 표현을 현대어에 맞게 고친 것이다. 그 중 1절의 ‘영’은 <빛나고 맑은 기운>, 2절의 ‘이룩’은 <이룸, 완성함>, ‘정성덩이’는 <정성(精誠)의 덩어리>, 3절의 ‘굄대’는 <굄목, 고임목一支柱木>으로 풀이되는데 ‘연해킨’은 <연하의 키운, 연하여 커진>으로 보이지만, 더 고찰을 요한다. 또 위당의 일반 시조를 보면 자신이 깊은 의미를 강조하려는 용어에 반드시 인용부호를 쓰는데 위의 가사 중 1절의 ‘바다’, 2절의 ‘눈’, ‘해’, 3절의 ‘굄대’에 인용부호가 붙어있다.

6·25가 일어나던 해, 조용만이 위당의 고대 교가 가사를 입수한 경위는 이렇다. 당시 그는 모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1주일에 하루 강사로 고대에 출강하고 있었다. 1950년 이른 봄, 조용만은 신문사의 원고 청탁차 남산 밑의 위당댁을 찾아갔다. 그런데 위당은 고대의 교가가 완성되었으니 학교 나가는 길에 현총장에 전해달라고 교가 원고를 내놓았다. 그러면서 위당은 가사를 외우면서 한구절씩 뜻을 설명하더니, 이 교가를 짓기 위해 꽤 오래 애썼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보성전문학교 교가는 春園(이광수)이 지었다는데 이번 것도 그에게 맡기지 않고 왜 나같은 구식 시조쟁이한테 맡겨서 남의 땀을 빼게 할까”하며 소리 내어 웃더란 것이다. 그 후 조용만은 시간이 맞지 않아 교가를 못 전한 채, 다른 원고 청탁차 위당을 다시 찾아 갔더니 그날 학교에서 교가를 찾으러 와서 다른 원고로 베껴주었으니 먼저 원고는 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되어 교가 원고가 조용만의 수중에 들어왔는데 곧이어 6·25가 일어나 전쟁의 와중에 원고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5년 후인 1955년 새 교가가 제정된다는 말을 듣고, 책틈에 있던 원고를 찾아내 그간의 경위와 함께 이 사실을 고대신문에 “위당선생과 고대교가”란 글을 통해 발표했던 것이다.

생각하면, 위당의 고대 교가는 기구한 운명으로 사장(死藏) 되었던 셈이고 더구나 당시 현총장도 위당선생도 모두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남침으로 도발된 전쟁의 참화가 얼마나 컸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더구나 납북된 두분 모두 해당 분야 한국 최고의 국보적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국가적 손실이었다. 위당 정인보(1893~1950년 납북)는 한국 으뜸의 국학자로 연희전문 교수를 퇴임한 후는 초대 국학대학장을 지냈고 ‘삼일절 노래’, ‘광복절노래’, ‘개천절노래’를 작사한 유명한 시조작가이기도 했다. 현재 캠퍼스에는 강의동 「위당관」이 세워져있다.

이런 역경을 겪은 후 휴전이 성립되고 학교가 안정이 되면서 1955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유진오 총장의 계획에 의해 현 교가가 탄생되었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작곡자 윤이상은 더 말이 필요없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세계적 작곡가로 작사자인 조지훈 교수의 청탁을 쾌락, 교가를 작곡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엔 2개의 교가를 작곡, 유총장 댁에서 총장, 학장, 교수, 작곡자 등이 모인 가운데 자신이 피아노를 치면서 자창(自唱)한 끝에 최종 확정된 것이 현 교가였다고 ‘고대 교가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말하고 있다. 또 그는 “교가를 부르는 것은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읍니다…… 이 교가가 현재나 장래에 여러분의 학교에 대한 감회와 항상 같이 할 수 있기를 작곡자로서 바라는 바이요……이 노래가 여러분의 진리의 탐구와 애교심에 통하여 길이 좋은 반려가 되었으면 이상에 없는 소망이겠음니다”란 당부를 하고 있다.

고대 교가는 모든 고대인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요, 우리 모두의 힘과 꿈의 포상이다. 모든 고대인들이여! 어느 때고 마음이 외롭고 쓸쓸할 때, 한없이 모교가 그립거든 우리 모두 교가를 소리 높여 부르자. (부기, 위당의 고대 교가 가사는 1983년 연세대 출판부 간행의 《담원정인보전집》1권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또 다른 원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