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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직접IR을 주도하는 금융권 내 몇 안되는 글로벌 CEO
"요즘같은 글로벌 시대에 우리의 경쟁상대는 씨티은행이나 HSBC은행같은 글로벌 은행들입니다. 지역에 있다고 해서 지역적인 마인드만 가지고 따라가면 뒤쳐질게 뻔하지요." 37년 전 모교를 졸업하며 더 많은 기회를 찾아 지방은행인 대구은행에서 주판을 잡기 시작한 이화언(경제64) 교우는 신입 평사원으로 시작해서 지난 2005년 3월 은행장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이미 금융권에서는 직접 IR(Investor Relation, 기업이 자본시장에서 정당한 평가를 얻기 위하여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홍보활동)을 주도할 수 있는 몇 안되는 CEO로 알려져 있으며,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태풍 ‘매미’피해지역 수해 복구 작업 참여 등 지역의 대표은행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에도 큰 힘을 쏟고 있는 대표적인 명사(名士)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교우가 취임한 뒤 대구은행의 외적성장을 살펴보면, 2000년 말에 주당 1,400원에 불과했던 주가가 지금은 10배가 넘는 16,000원에 이르고 있고, 대구경북지역 인구의 62%를 고객으로 삼고있는 우량은행으로 발전했다. 한 자리 수에 불과했던 외국인 지분율도 적극적인 해외IR활동으로 65%대까지 끌어 올렸다. “경영을 하면서 가장 중요시 하는 부분은 직원 중시의 경영이다”고 밝힌 이 교우는 “직원들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직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면서 이익이 나면 그들에게 보상하는 것”이 그 요체라고 말했다. 매달 전 직원들에게 발송되는 CEO레터, 임원 평가시 큰 영향을 끼치는 펀(Fun)경영, 여기에 노조를 경영의 핵심파트너로 생각하는 이 교우의 인재관은 여러 언론으로부터 직원들을 아끼다 못해 ‘섬긴다’는 표현을 쓰게 만들 정도다. 또 외국투자자들에게는 환경, 윤리, 지속가능경영 등 기업의 사회책임 분야에 대한 성실... [2007-03-28](Hit:20281)

6 · 3 항쟁의 동지애를 교우회 100주년 특별전에 기증!
1965년 6월의 어느 날, 짧은 머리에 검은 가방을 든 학생들이 하나둘씩 가정집 지하실로 모여든다. 머리를 맞댄 그들은 페인트로 ‘YANKEE KEEP SILENT’라는 문구를 힘차게 써내려간다. 그렇게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그들은 거리로 나선다. 안암동에서 동대문까지 팔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친다. 애국가, 교가를 부르며 걷고 또 걷는다. 지난 1월 31일 모교 박물관에서 열린 기증식에 참석한 박철현(정외62)교우가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한 장면이다. 박교우는 5.16군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투쟁 및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투쟁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다. 박교우가 모교에 기증한 자료는 20여점,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기증물품에는 모의국회 아남민국 배지, 대동민국 상장, 졸업기념 패넌트 외에도 정외과 비밀결사조직 의활단 유인물, 학생운동 주동자 명단, 학원 프락치 YTP에 대한 일기,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칫솔을 깎아 만든 조각상 등 6.3항쟁 관련 자료가 다수 포함돼 눈길을 끈다. 6.3항쟁의 주최가 된 모임은 1960년대 모교에서 활동했던 정치외교학과의 비밀결사조직 ‘의활단’이었다. 당시 정경대 학생회장이었던 박정훈(정회61)교우가 의활단의 총무역할을 했다. 주요 안건은 최장집(정외61·정치외교학과 교수)교우와 서진영(정외61·정치외교학과 교수)교우가 중심이 되어 결정했다. 박교우는 조홍규(정외61)교우와 함께 결의문 작성을 주로 맡았다. 김덕규(정외61), 이명박(경영61), 유유길(상62), 노상봉(상62) 교우 등도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이었다. 사회과학서적을 읽으며 시대를 논하던 친구들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로 남았다. 박교우는 당시 정외과 서클이었던 민주정치사상연구회(민정회)에서 사무총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날... [2007-02-26](Hit:24216)

2007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당선자 김남석(국문92,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교우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는 순간 사실은 참 괴로워집니다.” 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영화평론가로서의 출사표를 던진 김교우의 첫 마디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 “취미로 삼던 것이 직업이 되다보면 자연스레 인간관계와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취미로만 계속 남아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힘들 거에요” 이어지는 그의 이 말 속에는 그러나 영화에 대한 애정과 함께 세상을 향해 이제 내 목소리를 내겠다는 포부와 자신감이 녹녹히 묻어난다. “내 글은 이제까지의 평론과는 다를 것” 이라고 못박는 김교우는 평론계에 대해서도 “흥행에 영향을 주게 되니 싫은 소리를 못하고 무한칭찬만 하게 된다”며 “당장에는 유익해보이지만 결국 한국 영화의 발목을 잡게 된다” 고 애정 어린 비판을 했다. 김교우는 “요즘 영화를 문학과 분리시키기 위해 서사를 강조하면서 영화평론의 중심이 현장으로 가는 경향이 있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시나리오가 중심” 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대학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한 그의 내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는 모교에서 『1960∼70년대 문예영화 시나리오의 영상 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그는 이미 문학, 연극평론가의 호칭도 갖고 있다. [2007-02-02](Hit:22206)

저소득층 자녀를 돕는데 교육이 최우선 과제 성기환(법학82)교우
“하루에 열 번씩 용기(勇氣), 의기(義氣), 화기(和氣)의 삼기(三氣)를 마음속에 새깁니다” 스타 수학 강사로 일명 ‘알긋나’ 선생으로 통하던 디딤돌 학원 원장 성교우의 좌우명이다. 성 교우는 사교육계에 사회 환원 정신을 심은 선구자로 통한다. 그는 사교육의 철저한 수요 ․ 공급 관계를 깨고 ‘돈이 없어서 사교육을 못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일념아래 저소득층 자녀들의 교육에 앞장 서 왔다. 저소득층 자녀가 원하는 학원을 다닐 수 있게 연결해준 것이다. 단순히 학원비를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장학증서를 수여함으로서 학생에게 동기부여를 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멘토링 개념의 사회환원 운동으로 성교우는 서울시교육청, 서초구청 등 공공기관에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저소득층 자녀를 돕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일이 아니었어요. 각 학원마다 2~3명의 학생을 맡아 가르치면 되는 것이거든요. 제가 살던 고향에서는 저와 동갑내기가 17명이었는데 이 중 14명이 도회지로 유학을 갔어요. 그런데 기본실력이 없어서 대학까지는 가지 못했죠. 당시에 누군가가 그 친구들을 조금만 도와줬다면 훨씬 더 좋았겠죠.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최근 개인과외, 공부방 등이 난립하면서 학원 경기가 좋지 않지만 그는 힘이 닿는 데까지 학생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다. 성교우가 언제나 강조하는 말 중의 하나는 ‘호응’. “살아감에 있어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것은 어떤 일보다 중요하죠.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호응이예요. 세상에 혼자할 수 있는 일은 없잖아요.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호응을 해주면 모든 일이 즐겁고 효율적으로 이뤄지기 마련이죠” 그는 이러한 호응의 중요성을 모교 재학시절 깨달았다고 한다. [2007-01-25](Hit:22282)

KCC감사위원장 김건일(경제64)교우

학생시절 모은 모든 게 사료가 됩니다!
“당시에는 다음 학기 시간표를 짜기 위해서 고대신문에 게재된 수강과목을 확인했었어요” 김 교우는 빛바랜 64년판 고대신문에 빼곡하게 실린 수강과목들을 가리키며 옛 추억에 잠겼다. KCC에서 상무, 전무를 지내고 현재는 KCC 감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교우는 모교 박물관에 개인소장품들을 기꺼이 기증했다. 기증품들은 김 교우가 64년 대학에 합격한 순간부터 68년 졸업하기까지의 면면을 모두 보여주는 자료다. 합격 이후 등록한 영수증, 학생증, 수업 듣고, 시험을 보고, 졸업하기까지의 모든 자료들이 다 있는 셈이다. 따라서 기증품들은 김 교우와 학창시절을 함께한 추억의 물건들이며 모교 역사에 중요한 증거가 될 자료다. 수강시간표 뿐만 아니라 수험표, 합격증, 시험시간표, 64년 학교일람, 가을 체육대회 마라톤 우승컵, 교양국어 교재, 교양영어 교재, 학생증, 69년 3선 개헌을 앞두고 각 단과대 학장들이 학생들의 폭력사태를 우려해 단속을 촉구하는 가정통신문을 수기로 직접 작성해 발송했던 자료도 있다. 또 대학 졸업 후 72년 KCC에 입사할 때부터 30년 치 재직 월급 명세서 까지 있다. 월급 명세서의 양식이나 월급 금액 변화를 보면 한국경제의 변화도 짐작할 수 있다. 기증품마다 얽힌 사연들도 모두 흥미롭다. “10월에 가을체육대회 마라톤 경기가 열렸는데 럭비선수 김정남을 비롯해 운동부 학생들도 일반 학생들과 함께 뛰었는데 제가 거기서 우승을 했죠. 수유리 4.18 기념탑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중학교 때 육상선수 했던 실력이 발휘된 거 같아요. 과별 대항전이었는데 1학년 학생 중 교양학부 소속인 제가 그 영광을 안게 되었어요” 당시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선수가 세계 마라톤의 강호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이라 김 교우의 별명도 자연히 ‘아베베’로 붙여졌다고 한다. 기증품 가운데 6... [2007-01-12](Hit:21879)

신영필름 대표 김태우(경제60) 교우

손자뻘 동기생과 만학의 열정 불태우다
“학점은 잘 받을 필요가 없지만 내 자신과의 약속은 꼭 지키고 싶었다” 김태우(경제60) 교우는 지난 1960년 모교에 입학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 도중에 독일광부로 지원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독일에서 1억 3천만 불의 차관을 얻으며 지급보증으로 광부와 간호사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중이었다. “그 때가 3학년 2학기였는데 등록하고 공부하다가 기말고사 시험도 못보고 독일로 가게 됐지” 범인들 같으면 독일에 가자마자 지하 1000m에서 38도의 고온을 견디며 3년 동안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법도 하건만 김 교우는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그 결과 석탄을 캐면서 나오는 빈 공간을 돌로 채워놓는 기술에 대한 자격증을 따내는 등 독일로 온 것을 오히려 하나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독일 얘기가 나오자 김 교우는 “고등학교 다닐 때도 독일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근면, 정직 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더 정부(正否)를 철저하게 구분하더라고”라고 운을 떼며, “우리학교도 독일 같은 유럽의 나라들과 더 많은 교류를 해서 그들의 철학과 준법정신 같은 것을 더 배웠으면 좋겠어”라고 독일에 대한 생각을 털어 놓았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 뿐이었지만 독일의 탄광회사에서 보여줬던 영화들은 김 교우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광부계약 기간이 끝났었지만 남아서 영화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 마침 독일은 외국인들을 위한 장학제도도 잘 되어 있었고” 그 때 배운 공부들이 도움이 되어 1969년 한국에 돌아와 신영필름을 세우고 2000년도에는 ‘왕의 남자’, ‘실미도’, ‘공동경비구역 JSA’ 등 한국영화의 대표작들의 산파역할을 했다. 하지만 영화계에서의 거대한 업적도 김 교우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채우지는 못했다. “상처(喪妻)를 한지 10년이 됐는데 어느 날 부인이... [2007-01-12](Hit:29225)

기업인 감성경영, 문화예술인 경영마인드 제고
문화예술최고위과정 개설 ‘문화·예술의 불모지’ 미술학부를 제외하고는 문화·예술 관련 단과대가 없는 모교가 그 동안 들어야 했던 오명이다. 실제로 많은 수의 교우들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음에도 모교는 ‘음대가 없다’, ‘미대가 없다’라는 이유로 이런 오명을 벗지 못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는 모교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모교를 불모지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 같다. 오는 3월 개설을 목표로 모교 박물관(관장=최광식·사학72·한국사학과 교수)이 문화예술최고위과정 제1기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인들에게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한류(韓流)를 통해 문화컨텐츠가 ‘돈’이 되는 것을 목도한 이유도 있겠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더욱 알고 싶어하는 순수한 욕구가 넘치는 기업인들이 더욱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예술인들에게도 감각만큼이나 경영마인드가 요구되고 있다. 몇몇 대학이 문화예술최고위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 모두를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박물관이 이번에 개설하는 문화예술최고위과정은 문화·예술에 관심있는 경영인에게는 그에 대한 이해와 소양을 길러주고 문화예술인에게는 경영마인드를 심어주자는 것이 최대 목표이다. 단 두 번 일간지에 광고했을 뿐인데도 이미 박물관에 문의전화가 쇄도하는 등 관심이 높다. 박물관 개혁의 정점에 서 있는 최 관장은 이런 반응에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몇몇 교우들에게 연락을 드려봤는데 등록하고 싶어 하더라구요. 이명박 전 서울시장님도 수강생이 많을 것 같다며 기회가 된다면 꼭 등록하고 싶어 했습니다.” 박물관이 구상한 커리큘럼과 강사진을 본다면 누구든지 한번 쯤은 수강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싶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문화의 방향을 짚어보고 문화... [2007-01-12](Hit:31091)

경영 혁신과 연구 역량 강화로 'BIG5' 병원 넘어서겠다
2006년 수시 1학기 모집 경쟁률 203대 1, 2학기 179대 1. 국가고객만족도(NCSI) 병원의료서비스부문 아산병원, 서울대병원보다 높은 75점으로 4위. 그 동안 모교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다는 심한 얘기까지 들어야 했던 의료원과 의과대가 달라졌다. 서울대 의대를 훌쩍 넘는 수시 모집 경쟁률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병원들보다 높은 고객만족도를 얻은 것은 수치화된 단편적인 자료에 불과하다.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는 의료원과 의과대 구성원들이 그 동안의 열패감을 털어버리고 자긍심으로 재무장하기 시작한 점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2003년 10월부터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을 맡아오고 있는 홍승길(의학64) 교우가 있다. 취임 이후 홍 의무부총장이 역점을 두고 추진 중인 전략은 경영 혁신과 연구중심대학으로의 변화. 어찌보면 이런 전략은 모교 의료원과 의과대학의 현실을 감안한 고육직책이었다. 이는 홍 부총장이 거리낌 없이 “‘빅 5’와 경쟁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빅 5’란 현대 아산병원, 삼성병원, 서울대학교 병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톨릭의대 성모병원을 두고 이르는 말. 이미 건물과 교수진 등에서 따라가기 힘든 격차를 보이고 있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이들과 같은 수준에 올라서는 것은 후발주자인 모교 의료원과 의과대학에게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 모교 의료원의 1년 예산은 5천억원 수준. 1년 예산이 1조원에 달하는 세브란스병원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결국 홍 부총장은 최저의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했고 이를 위해서 경영 혁신과 연구 중심대학으로의 변화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가장 먼저 추진된 것은 행정시스템의 개혁. 홍 부총장은 취임하자마자 그 때까지 의료원을 이끌어오던 많은 사람들을 내보냈다. 지금까지의 행정시스템이 제... [2006-11-12](Hit:21295)

성실과 책임의식을 금과옥조로 공직에 임하겠다
정세균(법학71)교우는 “미스터 스마일”이란 별칭을 얻을 정도로 항상 웃으면서 사람들을 대한다. 그러면서도 강한 신념의 소유자다. 정책수립이나 정치적 결단의 순간에는 단호함과 일관성을 보인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정치인이란 수식어가 딱 어울린다. 그런 그가 지난 2월 여당 당의장에서 내각의 말단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당시 이 문제를 두고 호사가들은 말이 많았지만 그는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국가경제의 초석을 쌓기 위해 산업자원부 장관으로서 현장에 뛰어들었다. 현장에서 그는 동분서주했고, 그 성과는 앞으로 결실을 맺을 것이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장관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예의 선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는다.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정 교우는 만사 제쳐 두고 중소기업부터 방문했다. 현장 중심의 업무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난 8개월을 어떻게 생각할까? “스스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 매우 어렵지요. 장관취임 직후 환율불안, 고유가 등 대내외 여건이 어렵고 실물경제 역시 좋지 않아 걱정했던 게 사실입니다. 18여 년간의 민간기업체 근무경험과 10여 년간의 정치경험을 통해 체득한 지식과 경험을 활용, 새로운 산업정책 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처럼 정 교우는 기업인 출신이다. 78년 쌍용그룹에 입사해 95년까지 18여 년간 일하며 쌍용종합상사 수출입 담당 상무이사까지 지냈다. 기업에서 오랜 기간 일했기 때문에, 기업들이 원하는 정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 교우는 자원외교 활동에도 힘을 쏟아왔다. 지난 3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권 국가들과 자원외교를 펼침으로서, 구미편중의 자원외교에 다변화를 이끌어낸 바 있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자원빈국이죠. 제조업 경쟁력으로 돈을 벌어서 에너지를 수입하는데 66조... [2006-11-12](Hit:22675)

한국 하면 고려대가 떠올랐으면…
지난 10월 21일(토) 모교 백주년기념관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한국어문화교육센터를 기념하는 국제포럼이었다. 한국어교육센터가 국제적인 포럼을 단독 개최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일이다. 각국에서 참여한 석학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유석훈(영문78·문과대 언어학과 교수) 교우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 자리까지 한국어문화교육센터를 끌어 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유 교우가 지난 2003년 센터장으로 취임하며 내세운 키워드는 ‘문화’였다. 옛 명칭이었던 ‘한국어교육센터’를 ‘한국어문화교육센터’로 바꾸고 언어교육에만 한정돼 있던 그동안의 프로그램에서 문화체험의 기회를 대폭 늘리면서 센터는 언어와 문화교육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해나갔다. 매년 5월에는 외국인 학생들의 전통축제가 열리고 11월에는 외국인연극대회가 개최됐다. 난타공연을 관람하거나 인사동으로 소풍을 떠나고 찜질방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모교 측에서도 한국어문화센터의 가능성을 엿보고 지난 10월엔 라이시움 1층에 공간을 마련, 18개 강의실을 신설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일까. 한국어문화교육센터의 학생 수는 549명이 등록했던 6년 전과 비교해볼 때 놀랄 만큼 성장해 지난해에는 2000명을 훌쩍 넘겼고 올해는 3500명 선을 바라보고 있다. 외국학생들이 이처럼 생생한 한국문화를 접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일까. ‘1대1 도우미 제도’를 소개하는 유 교우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모교에서 도우미제도가 시작된 지 올해로 7년째. 모교 재학생들로 구성된 1대1 도우미들은 그들과 일상생활을 함께 하며 우정을 나눈다. 연극대회 및 각종행사 준비도 충실히 돕는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한국어를 배우러 온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더 몰입하게 된다. 원하는 학생의 경우 한국에 머무는 동안 ... [2006-11-10](Hit:2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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