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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푸른 기운으로 남은 청년불자들의 구도정신1965년 7월 10일 사고와 그 뒷이야기

등록일 : 2015-07-17 조회 : 14923
<div align=left>1965년 7월 13일 조선일보 7면 기사. 상단 왼쪽부터 안경희(국문 3학년), 오 상대(경영 3학년), 민영혜(국문 3학년). 정명훈(경영 2학년), 조화연(국문 3학 년), 윤복순(상과 3학년), 한춘자(독문 3학년), 이희임(국문 2학년), 김귀임(국문 2학년), 박하경(사회 2학년).
1965년 7월 13일 조선일보 7면 기사. 상단 왼쪽부터 안경희(국문 3학년), 오 상대(경영 3학년), 민영혜(국문 3학년). 정명훈(경영 2학년), 조화연(국문 3학 년), 윤복순(상과 3학년), 한춘자(독문 3학년), 이희임(국문 2학년), 김귀임(국문 2학년), 박하경(사회 2학년).

1965년 7월 5일. 고려대학교불교학생회(이하 고불회)가 모집한 재학생 53명은 강원도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로 10일 예정의 하계수련대회를 떠났다. (당시 언론기록은 고불회원 38명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교우들 전언에 따르면 고불회원이 아닌 15명의 학생이 수련회 모집공고를 보고 동참했다고 한다.) 김영두, 손명현 교수가 강사로 초빙되어 동행했고, 대학생 불교활성화에 앞장섰던 탄허 스님도 지도법사로 동참했다. 구도를 위해 수행 정진하는 승려들과 동일한 생활을 체험하며 불교를 깊게 이해하고자 마련된 수련회였다. 새벽 3시 기상으로 시작되는 일정은 예불, 좌선, 독송에 이어 동양철학, 역학, 대승불교 강의로 짜여졌다. 승려들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7월 10일.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일행은 사흘 전 입적한 상원사 주지 원보산 스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월정사로부터 12km 떨어진 상원사로 향했다. 장례식을 마친 후 일부는 오대산 정봉인 비로봉으로 향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상원사 일대의 암자를 답사했다.

수련회남은 일정 위해 스크럼짜고 계곡 건너다희생
한낮이 되자 장대비가 두 시간 넘게 쏟아졌다. 골짜기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고 계곡 물은 급류로 돌변했다. 비에 젖은 일행은 월정사로의 귀로를 서둘렀다. 4시 10분경, 1진 10여 명은 무사히 월정사에 닿았다. 2진 13명은 이들보다 약 30분 늦게 상원사로부터 4km 떨어진 동피골 오대천에 이르렀다. 평소의 오대천은수심20cm, 폭8m 정도의 개울이지만 당시는 수심 80cm, 폭 20m의 사나운 모습이었다. 두 주먹보다 큰 돌들이 굴러다닐 정도의 물살이었다.

급류가 흐르는 오대천 앞에서 상당 시간을 고민한 일행은 내를 건너기로 결심했다. 당초 손명현 교수는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나 학생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전 7시부터 줄곧 산길을 다녀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고, 월정사로의 복귀 후 또 따른 수행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13인은 스크럼을 만들어 서로에게 의지한 채 물로 들어갔다. 선두가 반대편에 닿을 즈음 대열의 중간에 있던 여학생 한명이 물살을 못 이겨 쓰러졌고 당황한 일행은 중심을 잃고 급류에 휩쓸려 내려갔다.

후미에 있던 손 교수와 박찬영(화공65) 군은 30m 가량 떠내려가다 사투 끝에 위기를 모면했고 중간에 있던 심재학(법학64) 군도 100m 가량을 떠내려간 후 풀포기를 잡고 구사일생했다.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학생들(남학생3명, 여학생7명)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특히 선두에 섰던 윤복순 군과 오상대 군은 뭍으로 올라왔으나 다른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뛰어들었다가 참변을 당했다.

고대 역사상유례없는참사 佛子뿐 아니라 전국민 애도
불법의 진리를 추구하다 희생된 10인의 소식에 모교 구성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국이 슬픔에 빠졌다. 당시 주요 일간지는 이 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13일, 영구는 모교 교정을 순회한 뒤 조계사에 안치됐다. 이날에는 시민, 학생 등 2천여 명의 조문행렬이 줄을 이었다. 새벽에는 유진오 모교 총장도 조계사를 찾아 60년 고대사에 없었던 참변에 목메어 울었다. 14일 10시. 10인에 대한 합동 영결식이 진행됐다. 이 영결식에는 윤택림, 장준하, 김성곤(보전상학30회), 홍종인 씨 등의 명사들은 물론 모교와 불교계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청와대 등도 조화를 보내 슬픔에 동참했다. 유진오 총장은 조사에서 “한스러운 죽음이 우리에게 엄숙한 교훈을 주었다”며 “벗의 유지 받들어 더욱 정진하자”고 했다.

10인은 6천여 조의객들의 슬픔을 뒤로한 채 홍제동 화장장에서 한줌의 재로 타올랐다.

1960년대는 청년 불자, 특히 대학생 불자가 드문 시기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3년에 창설된 고불회는 한국청년불교의 중심 조직이었고, 청년불자에게서 불교의 미래를 본 월정사 주지 탄허스님은 고불회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법회를 열어 젊은 불자들을 응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불자 10인의 죽음은 더욱 더 큰 손실이자 아픔이었다.

희생자이름 새긴 연화탑건립 매년 7월 연화제지낸 교우들
사람은 떠나고 슬픔은 남았다. 모교 교우들은 슬픔을 견디고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탑을 만들고 연화탑으로 명명했다. 사고 당시 수습대원으로 현장에 달려간 서상욱(정외63) 교우는 이듬해인 66년 총학생회장이 돼 연화탑 건립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66년 7월 10일,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연화탑이 사고 현장 인근에 세워지고 첫 번째 연화제가 열렸다. 그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불회, 고불교우회, 월정사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연화제를 열고 있다.

50년의 기간 동안 중단될 위기도 있었다. 70년대 말과 80년대초가 그랬다.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당시 대학가의 주류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연화제를 외면했다.

그때 명맥을 이은 이가 이동식(기계공76) 교우다. 이 교우는 다른 이들이 외면할 때 홀로 연화탑을 찾아 제를 올렸고 해외근무 등으로 챙기지 못할 경우 그의 동생과 아내가 연화제를 지냈다. 그의 아내 정영진씨는 결혼 이후 37년 동안 한 차례도 빠짐없이 연화제에 참석했고 이제는 명예 고불교우회원이 되어 이번 연화제에서 남편과 함께 공로패를 수상했다.

긴세월 동안 슬픔은 옅어졌다. 그리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따랐던 10인의 구도정신은 또렷해졌다. 그 정신을 선명하게 새긴 것은 그들을 잊지 않았던 고불회, 고불교우회, 월정사의 구성원들이다. 이들은 청년불자들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연화탑을 불교성지화하기로 했다. 이제 국립공원 오대산은 청년불교의 성지로 거듭날 것이고, 오대산 선재길을 걷는 이들은 누구나 1965년 7월 10일 구도정진 중 순교한 고려대학교불교학생회 10인의 정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순호 기자


<div align=left>비가 오는 가운데 거행된 50주기 연화탑 참배 모습. 연화탑의 기둥에는 당시 희생된 10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가 오는 가운데 거행된 50주기 연화탑 참배 모습. 연화탑의 기둥에는 당시 희생된 10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월정사 연화탑은 성지, 10인의 희생자 젊은 부처로 환생할 것”



제50주기 연화제 행사가 이달 3일(금)부터 3일간 오대산 월정사에서 개최됐다. 연화제는 1965년 불교학생회 여름 수련대회 중 동피골 계곡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려대생 10명의 넋을 기리고 구도정신을 계승하는 행사다.

사고 이듬해인 1966년에 연화탑 건립과 함께 시작된 연화제는 50년의 세월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대학교불교학생회교우회(회장=박재붕·전기공75, 이하 고불교우회), 고려대학교불교학생회(회장=정원식·경영11, 이하 고불회)가 중심이 된 이번 행사는 고려대학교 불자교우회(회장=정찬규·행정71)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총동문회가 공동주관해 다채롭고 성대하게 치러졌다.

50년 이어온 연화제에유가족 감사
본식인 연화제는 5일(일) 오전 9시부터 월정사 대적광전에서 진행됐다. 고불회, 고불교우회, 불자교우회, 대불련 총동문회 회원 150여 명과 유가족들이 참석했다.

박재붕 고불교우회장은“ 50년 전 구도수행중 불의의 사고로 이승을 떠난 선배들의 구도 정신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기려온 지도 50년의 세월이 흘렀다”며 “선배님들의 정신을 살려 젊은 불법을 전파하는데 앞장서겠다”고 했다.

월정사 주지인 정념 스님은 법문에서 “당시 수련회에 참여한 53선지식의 의미를 되새기는 길을 만들고 연화탑 주변을 청년불교구도성지화 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연화탑 참배는 같은 날 오후 3시부터 진행됐다. 150여 명의 참석자가 연화탑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비가 내렸다.

참배는 삼귀의와 반야심경 독경, 범패, 제문 순으로 이어졌다. 故안경희 씨의 사촌 오빠인 안경환씨는 참배 소감으로 “죽은 사람의 무덤은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이라는 말로 지난 세월을 설명했다. 이어 “고인들이 추구하던 이념을 이어받아 서로서로가 사랑하는 나라를 만드는데 앞장서자”고 했다.

참배가 진행될수록 구름이 짙어지고 빗줄기가 굵어졌다. 행사를 공동주관한 네 단체의 대표가 젊은 대학불자 양성에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공동 발원문을 낭독했다. 이후 천도바라가 끝나고 진혼조문을 낭독하자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빗줄기도 잦아들며 청량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참석자들은 “고인들의 50년 맺힌 한이 풀린 듯하다”며 기뻐했다.

대학불교운동 대담과 세미나
행사 첫째 날인 3일(금)에는 선재길 순례와 삼보일배가 있었다. 20여 명의 고불회원과 고불교우회 회원은 월정사-연화탑-중대사자암은 도보로, 중대 사장암에서 적별보궁은 삼보일배로 이동했다.

둘째 날인 4일(토)에는 연화제와 함께 대학불교운동이라는 주제로 대담이 개최됐다. 1963년 고불회 창립 멤버인 이채영(경영61) 교우, 1966년 연화탑 건립위원장이었던 서상욱(정외63) 교우,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 법안스님(본명 이은경·경제78) 등 11명이 대담했다.

이채영 교우가 탄허스님이 고대 뒤편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경번역을 하면서 고대불교 학생회에서 요청하면 기꺼이 강론을 맡았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대담을 시작했다. 이어 오늘날 대학생 불자가 줄어드는 현상과 개선 방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법안스님은 “대학생 포교에 앞장섰던 큰 스님들과 희생된 선배의 뜻을 새긴 연화탑과 월정사를 청년 불교 구도의 성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정념스님은 “고불회는 대불련과 더불어 청년불교 구도정신을 선도한 곳”이라며 “연화제 행사가 졸업생 중심 행사로 바뀌어 가는 현실”을 아쉬워했다. 또한 “월정사도 연화제와 50년의 인연을 맺어온 만큼 이곳이 성력의 장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연화제 관련 학술세미나는 셋째 날인 5일(일) 법륜전에서 오전 11시 30분부터는 열렸다. 고불회 지도교수인 조성택(영문77·철학과 교수) 교수와 동국대 김광식 교수가 발제자로 참석했다.

조성택 교수는 ‘우리시대의 부처님’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기억 속의 부처는 언제나 현재의 부처”라고 말하며 10인의 희생자를 “우리 기억 속의 젊은 부처로 환생시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진 질의시간에는 불교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갔다. 50주기 연화제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건식(심리79) 교우는 “이번 연화제는 지난 50년을 바탕으로 미래의 50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하며 “연화탑 성지화등이 공론화되는 등 큰 성과가 있었다”고 평했다.

<div align=left>1965년 7월 10일, 고대불교학생회 재학생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피골 오 대천의 현재 모습.
1965년 7월 10일, 고대불교학생회 재학생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피골 오 대천의 현재 모습.

<div align=left>중도 사자암에서 적멸보궁을 향해 삼보일배로 이동하고 있는 50주기 연화제 참가자들.
중도 사자암에서 적멸보궁을 향해 삼보일배로 이동하고 있는 50주기 연화제 참가자들.

<div align=left>연화제 관련 학술세미나에서 조성택 교수(오른쪽 두 번째)가‘우리 시대의 부 처님’이라는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연화제 관련 학술세미나에서 조성택 교수(오른쪽 두 번째)가‘우리 시대의 부 처님’이라는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div align=left>50주기 연화제를 공동주관한 고대불교학생회교우회 박재붕 회장(오른쪽)과 불자교우회 정찬규 회장.
50주기 연화제를 공동주관한 고대불교학생회교우회 박재붕 회장(오른쪽)과 불자교우회 정찬규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