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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종연(李鍾淵) 선배님을 기억하며
커버스토리·특집 편집국 2024-06-17 조회수 : 1428

이종연 교우 부부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48학번 이종연 학생증 


미 해병대 복무 당시 


미 해병대 통역병 당시 막사 앞에서 




모교 재학중 학도병으로 참전했고 맥아더 장군 통역관을 지낸 이종연 교우는 지난 5월 1일 미국 애틀랜타에서 별세했다. 

보훈의 달을 맞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까이서 교우님의 삶을 기록했던

애틀랜타교우회 김수영(영문95) 교우의 회고 에세이를 싣는다. 



생전 교우회 명예이사로 추대

고려대학교 미동남부지부 교우회에서는 애틀랜타 교우회 50년사를 편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애틀랜타교우회 곽용식(경영81) 회장님이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이종연(李鍾淵) 선배님의 인터뷰를 제안해 주셨다. 이종연 선배님은 교우회의 명예이사로 추대되셨지만 이사회에 참석하지 못하시고 이별하셨다.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48학번

선배님 댁은 언덕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48학번. 1950년 고려대학교에서 첫 학기를 시작하셨다. 당시 학생증을 아직도 간직하고 계셨다. 누런색으로 바랜 흑백 사진 속 20대 초반의 대학생, 다듬어지지 않은 생생한 젊음이 70여년을 훌쩍 건너 뛰어 다가왔다. 늘 온화하신 미소 속에 가끔씩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예리함은 오랜 직업인 변호사 업무 때문이었으리라 싶다.


전쟁의 발발과 현상윤 총장님에 대한 회고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선 좌익의 영향력이 커졌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다. 모친과 함께 서울로 왔다. 동부 용두동에 자리 잡고 고려대학에 등록했다. 선배님은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을 역임하신 현상윤 총장님에 대해 종종 언급하셨다. 1950년 6월 27일 오전, 강의실까지 들려오는 인민군들의 폭격소리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대한민국과 고려대학교는 망하지 않는다”며 <한국유교역사>를 끝까지 강의하셨던 현 총창님. 의연히 학교를 지키시는 현 총장님을 뒤로 하고 선배님은 홀로 계신 어머님이 걱정돼 댁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님을 설득해 피난길을 떠나려 하셨다. 그러나 어머님은 ‘쓸모없는 늙은이는 인민군이 끌고 가지 않을 것’이라며 만류, 아들만 떠나보내셨다. 선배님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3일 안으로 집으로 돌아오겠다 약속을 드리고 뚝섬으로 갔다. 피난민이 많아 배를 탈 수 없어 헤엄을 쳐 물결에 떠밀려 한강을 건너 봉은사 근방에 닿았다고 회고하셨다.


피난길에 만난 조지훈 선생

6월 28일,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무작정 총성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달아났다. 지나가던 농가에 들러 구걸로 배고픔을 면한 채 수원을 향해 걸었다. 도중에 피난길에 나선 조지훈 선생과 고려대 학생들을 만났다. 1950년 6월 중순까지만 해도 조지훈 선생에게 <시창작강의>를 들었었다. 선배님은 전쟁이 끝나면 계속 강의를 듣고 싶다 하셨고 조 선생님은 <두시언해>를 다음 학기에 들으라 권하셨다. 곧 전쟁이 끝나리라 생각했었다. 조지훈 선생은 한자로 된 두시도 아름답지만 조선 성종 때 언문으로 번역된 <두시언해>에는 한국말의 진실한 얼이 담겨 있다고 강조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대구에서 두 교우와 학도병으로 지원

선배님은 광주로 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당시 경제학과에 다니던 교우 정하택의 집에 머물며 서울 수복의 날을 기다렸다. 선배님에 따르면 정하택 교우는 <송강가사>를 쓴 정철의 직계 후손이다. 얼마 되지 않아 정하택 교우와 같이 경제학과에 다니던 교우 계봉혁도 광주로 내려와 함께 지내게 됐다. 평안도 신천 출신인 계봉혁은 하루가 멀다 하고 대구로 내려가 학도병으로 지원하자고 두 친구를 설득했다. 선배님은 정하택, 계봉혁 두 친구와 함께 광주를 떠나 대구로 가 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대구로 내려간 이틀 후, 광주는 인민군 제6사단에 점령당했다.


통역병으로 미 해병대에 배속

선배님은 대구시청 앞 게시판에서 미군부대 통역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계봉혁 교우와 함께 영어시험을 보았다. 며칠을 먹지도 씻지도 못해 간첩으로 오인받았지만 예전 선배님 댁에서 하숙했던 육군본부 공보처 박경선 소령이 떠올라 직접 전화 통화로 신분보장을 받을 수 있었다. 시험관은 그날 저녁 부산으로 내려가 곧 상륙할 미 해병대에 배속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계봉혁 교우는 이후 위스컨신 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모교 경제학과에서 가르쳤고 ‘IMF’와 ‘아시아 개발은행’ 이사로도 일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고 선배님은 회고하셨다.


장진호 전투와 ‘고토리의 별’

계봉혁 교우와는 장진호 전투의 현장에서 직접 만났다고 하셨다. 동이 트면 보이는 벌판에 쌓인 수백구의 중공군 시체들, 견딜 수 없이 참혹한 강추위 속에 얼어붙은 미 해병대원들의 시신들. 선배님이 쓰신 책 <6.25 전쟁 어느 학병의 수기, 아 장진호!>에 선배님은 생존한 장진군 피난민들의 송년회에 참석했던 일을 쓰셨다. 동대문 근방 불고깃집에서 술잔을 돌리며 회포를 풀다 어떻게 피난을 왔는지 알기에 서로 눈만 마주친 채 한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는. 나 또한 그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왔다. 그러나 ‘고토리의 별’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지으셨다. 1950년 12월 8일 아침 미 해병 7연대가 고토리를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12월 7일 초저녁까지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흐리거나 눈이 오면 항공기가 지상군을 도울 수가 없다. 특히 황초령에서 진흥리까지는 험악한 계곡이다. 그런데 12월 7일, 오후 9시37분 고토리 서남쪽 하늘의 구름 사이로 뚜렷하게 반짝이는 한개의 별이 나타났다. 비록 밤새도록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되풀이했지만 그 별은 다음날부터 진군하는 해병들을 호위하기 위해 비행기가 해병들 머리 위로 저공 비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 했다. 


전쟁의 혹독한 상처 피해 미국에 정착

2024년 4월 초 선배님의 안색이 좋지 않으셨다. 의지가 강한 선배님은 아프셔도 내색치 않으셨다. 병원에 다녀오시고 나셔서 애틀랜타에서 상영했던 영화 <건국전쟁>을 두 차례나 보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서울, 커다란 폭음과 함께 끊어져 나간 한강 다리 아래로 수백 명의 피난민과 차량이 수장되는 모습, 끊임없는 피난민 행렬, 혹독한 장진호의 추위 속에 얼어붙은 수백구의 시신들. 전쟁의 혹독한 상처가 눈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고향 황해도 연백을 뒤로 하고 미국에 마지막 거처를 자리잡은 이유였다. 선배님이 꿈꾸던 세상은 자유를 불허하는 공산주의 세상이 아니었기에 군 입대를 자원한 것이었다. 피난길에 부상당한 또래 20대 국군의 모습에 내심 죄책감을 떨치지 못했다고도 전해 들었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던 모든 전통과 문화, 종교와 단절해 사는 것이 미래라면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나 하셨다.


6·25는 다음 세대에 정확히 알려야 할 전쟁

병원 입원 직전까지 선배님은 마지막 마무리를 하셨던 것 같다. 평생에 감사했던 이들과 감사의 기록을 책상 위에 두고 가셨다. 4월 22일 존스크릭 에모리 병원 응급실 입원 직전,  선배님께서는 직접 고르신 사진 몇 점과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이 사용했던 지도의 복사본을 건네 주셨다. 호흡도 쉽지 않으셨다. 2021년 개봉된 중국 영화 <장진호>의 역사 왜곡에 대해 거듭 언급하셨었다. 학병으로 몸소 참전하셨던 6.25 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아닌, 다음 세대에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선배님은 6.25 기념일을 맞아 애틀랜타 연합장로교회에서 증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으셨었다.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했는데 기우가 되어버렸다. 선배님이 증언을 하셨다면 장진호 전투 ‘고토리의 별’과 미 해병대를 따라 피난길에 나섰던 하갈우리의 주민들, 흥남 철수 작전과 흥남부두를 떠나 피난민들을 태운 메리더스 빅토리아호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 같다. 


나와 선배님과의 인연

애틀랜타에서 선배님 부부를 처음 뵌 곳은 2023년 4월 초 에모리대학 인근의 프랑스 식당, ‘한국전 참전용사회 애틀랜타 레이먼드 데이비스 장군 19지회’ 회원을 위한 오찬 모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2012년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나눔의 집에서 이미 인사를 드린 적이 있기에 사실상 구면인 셈이다. 그 해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12년 후 나는 또 한 분과의 별리를 경험했다. 죽음의 전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쉽다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선배님을 기억하는 일이 내게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꿈 속에서도 전장의 상흔을 겪는다고 그 강한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영웅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 했던가. 선배님은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신앙으로 극복해 내신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6·25 전쟁, 20대 초반의 젊은 선배님 같은 분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명의 빚을 지고 있는지 생각하면 결초보은도 충분치 않다. 


늘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셨던 선배님,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예일로우저널'을 즐겨 읽으시고 시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즐기셨던 신사 선배님. 아버지에 이어 제게 죽음의 의미를 몸소 가르쳐주셨던 선배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삼가 호국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오며

피로 지켜주신 자유에 무한한 감사드립니다.


애틀랜타에서

후배 김수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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