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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중독과 흡연·음주로 이어지는 위험 건강한 성장 환경은 사회 전체의 책임어린이날의 창시자, 방정환의 삶매년 5월, 어린이날은 우리 사회가 가장 환하게 웃는 날 중 하나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즐기며 어린이의 권리와 행복을 되새기는 이 날을 만든 주인공은 소파 방정환이다. 그는 잡지 발간과 강연, 집필과 사회운동을 쉼 없이 이어가며 평생을 어린이를 위한 길에 바쳤다. 그러나 불과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방정환을 단순히 아동문학가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의 억압된 현실과 싸운 지식인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마른 체형으로 성장했지만,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의 사위가 되면서 생활이 안정되자 체중이 크게 늘었다.단맛과 근대 소비문화의 그림자그의 생활습관은 독특했다. 술은 거의 하지 않았으나, 전형적으로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설탕과 빙수를 즐겼고, 하루 종일 담배를 놓지 않는 애연가였다. 이는 개인적 선택을 넘어, 일제가 대만과 남양에서 들여온 값싼 설탕이 조선 사회에 급속히 확산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생활양식의 반영이었다.과로와 스트레스까지 겹치며 그의 몸은 급격히 무너졌다. 비만, 흡연, 과도한 당분 섭취, 불규칙한 생활이 심혈관 질환과 대사질환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경로였다. 1931년 여름, 그는 원고를 집필하던 중 코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불과 2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 남긴 말은 지금도 절절하다.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다. 어린 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이 한마디에는 어린이를 향한 평생의 열정과 시대적 과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오늘의 아이들, 같은 위험 속에오늘의 아이들도 여전히 비슷한 위험 앞에 서있다. 학업과 경쟁에 지치고, 사회적 긴장 속에서 성장한다. 후생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부모 세대의 영양과 스트레스가 자녀 세대의 건강과 습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설탕에 대한 갈망은 쉽게 중독성을 띠며, 나중에 흡연이나 음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식습관은 단순한 체중 문제를 넘어, 평생의 건강과 중독 취약성을 결정짓는다.오늘날의 아동 비만과 청소년 흡연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사회 전체가 직면한 구조적 도전이다. 방정환의 짧은 생은 오늘 우리에게 무거운 메시지를 남긴다. 어린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도록 돕는 일은 부모 개인의 책임을 넘어, 국가와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다.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방구뽕 캐릭터가 방정환을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방구뽕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놀고 행복하게 자라는 세상을 꿈꾸며 어른들의 질서에 맞서는 인물이다. 이는 방정환이 외쳤던 이상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우리가 이어가야 할 방정환의 길방정환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긴 숙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청량음료와 설탕 섭취를 줄이고, 흡연을 차단하며, 균형 잡힌 식사와 운동, 충분한 수면을 보장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생활 수칙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공동의 약속이다. 학력 경쟁, 디지털 환경, 가공식품과 당류의 범람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지켜내는 것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핵심적 과제다. 방정환이 남긴 숙제는 지금 우리의 실천을 기다리고 있다.이호준(의학85) 더베스트내과 심장클리닉 대표 원장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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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논술시험은 본래 독서와 사고력을 평가하기 위한 제도 명저 읽는 독서인으로 성장 유도 교육 방향 재정립해야왜곡된 논술: 수학과 영어로 변질된 입시근래 각 대학에서 입학전형 설명서에 ‘논술문’이라 명시하고 있는 시험은 대부분 진정한 의미의 논술문이 아니다. 특히 자연계 전공자를 선발하는 경우, 논술문이라 하면서 실제로는 수학 시험을 치르고 있다. 대치동에서 ‘자연계 논술반’이라 광고하는 학원들도 논술반을 모집한 뒤, 대학별로 지망 대학의 수학 문제를 분석하거나 해당 대학 수학 교수들의 전공을 파악해 예상 문제를 공부한다. 결국 각 대학은 논술이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만, 독서를 많이 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 실력을 다시 한 번 평가하는 셈이다.인문계 논술시험은 진정한 논술의 형태를 갖춘 경우도 있으나, 많은 대학에서는 영어를 다시 수험 과목으로 삼고 있다. 이미 치른 과목을 반복해서 시험 보는 것이다. 독서를 장려하고, 그 독서를 바탕으로 사고력을 기르며, 글쓰기를 통해 표현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이나 영어 시험을 다시 치르는 방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논술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시험이다.논술 도입의 배경과 고려대의 선도적 역할논술문을 대학 입시 과목으로 채택한 것은 1986년 전후, 한국 대학의 4지 선다형 객관식 시험 제도의 폐해가 사회적으로 문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객관식 입학시험을 주관식으로 전환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당시 주관식 시험에 대한 경험이 없던 각 대학은 신문 사설을 제시하거나 엉뚱한 주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논술문에 대한 전형 방식이 없었던 탓에 대학도, 수험생도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이에 고려대학교는 외국, 특히 유럽에서 시행되고 있는 논술문 출제 방식과 채점 기준을 수집하고 연구 발표했다. 독일의 아비투어, 프랑스의 바칼로 레아 논술문 문제집과 채점 방법을 독문학과와 불문학과 교수들이 연구해,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논술을 시행하는지를 발표했다. 더 나은 방법을 도출하고, 한국 청년들을 위한 획기적인 독서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 교무처장을 맡고 있던 필자(당시에는 입학처가 없었다)는 연세대학교 출제위원장이었던 친구 박순영 교수와 의논했다. 우리는 서울의 사립대학 교무처장 20여 명을 모아 수차례 회의를 진행해, 동서양의 명저 가운데서 논술문을 출제하기로 합의했다. 고려대학교에서 그 논지를 발표하며, 앞으로 서울 소재 대학들은 세계 명저를 기반으로 논술문을 출제하겠다고 선언했다.이로써 한국 대학 논술문의 전형 방식이 결정됐고, 대학에 입학하려면 이 방법을 통해 독서를 해야 했다. 한국의 모든 학생들이 세계 명저를 열심히 읽는 독서인으로 성장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고려대학교가 한국 대학 논술 전형의 방향을 개척한 셈이다.논술의 퇴행과 나아가야 할 길그러나 현재 많은 대학들은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명저를 읽는 대신, 이미 시험을 치른 과목을 중복해서 시험을 본다. 논술시험이라 하면서 수학이나 영어를 ‘논술전형’이라고 이름만 바꿔놓은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이제 대학은 다시 진정한 의미의 독서 기반 논술시험을 부활시켜야 한다. 고려대학교부터 변화해야 한다. 대한민국 청년들을 세계 명저를 읽는 독서인으로 다시 길러내야 한다. 교육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폭넓은 인문학을 바탕으로 독서하는 학생들이 입학하는 대학이야말로, 한국 교육의 올바른 길이라고 믿는다.김승옥(독문63) 문과대 명예교수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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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신방85) 편집위원 SK케미칼 고문“선배들에게 뭐 궁금한 거 없나요?”최근 교우회보 편집회의가 끝날 무렵, 60대 언저리의 편집위원들이 20학번대 교우회보 학생 기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11월호 평가와 12월호 기획 논의를 진행하며 주로 듣기만 하는 기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게다.“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꼭 하고 싶은 게 뭔가요?”, “학생 시절 꿨던 꿈들은 이제 다 이루어졌나요?”, “외무고시를 보고 싶은데, 취업이 쉽지 않은데, 도전하면 될까요?” 등 선배들이 이미 했음직한, 20대의 고민이 묻어 있는 질문들이 돌아왔다.“(80년대 당시 해외여행 금지시대) 황량함이 지배하는 스코틀랜드에서 장시간 배낭여행을 했으면…”, “꿈은 하늘에 떠 있는 별과 같은 지향점, 따라서 여전히 이어지는…”, “나를 시험한다는 의미에서 도전하기를, 경제적 독립이 정치적 독립의 시작이니…” 2차에 가서도 대화가 이어졌다. “대학생 때 제대로 사랑을 해봐야, 생각과 정서의 폭이 깊어지고, 삶이 더 풍부해지니…”문득, 20년 뒤의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다시 세 번째 스무살로 돌아간다면 꼭 하고 싶은게 뭔지, 꿈은 이제 이루어졌는지,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할지 등등.아마도 이런 답들이 나올 것 같다. “여행이든 뭐든 열심히 놀아. 70 넘으면 놀기 쉽지 않아. 빚을 내서라도 놀아야지”, “건강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하고 싶은 것들 다 도전해봐, 이 세상에 안 되는 것은 없어. 단지 안 했을 뿐이야”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더라도, 고대인들의 마음은 누구나 입학했을 당시의 스무 살이다. 모여서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 부르며 소리 지르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픈 마음이 가득하다. 이 같은 충만함이 늘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진다.세 번째 스무살을 맞는 85학번들이 내년 입학 40주년이 된다. 올해 장한 고대언론인상을 수상하는 황대일 연합뉴스 사장, 위정환 MBN 총괄상무, 이태규 한국일보 콘텐츠본부장 등 세 명 모두 85학번들이다. 이제 다들 사회생활의 정점에 있거나, 퇴직 준비를 하고 있거나, 이미 퇴직해 새로운 일들을 벼리고 있다. 세 번째 스무살로 새 출발하고 있는 85학번 3000여 명이 내년 을사년에 한국 사회에서, 세계 무대에서 어떤 일들을 벌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분명한 것은 있다. 모두들 '도전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Ad Astra’(별을 찾아서).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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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국문86) 편집위원에디터 / 《마녀체력》 저자댓바람부터 집을 나서며 남편에게 알린다.“하루 종일 강릉 바닷길 걷고 올 거야.”“누구랑 가는데?”“여..교..회.”4일 후, 아침 운동을 하며 나눈 부부의 대화.“클래식 음악회 가야 해서 저녁에 늦을지도 몰라.”“누가 주최하는 거야?”“여..교..회.”그리고 일주일 후, 저녁에 빨래를 개키면서.“내일 미술사 강의 듣는 날이야. 간식 먹고 올게.”“어디서 한다고 했지?”“여..교..회.”남편이 뱁새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뜨악하게 쳐다본다. 글 쓰느라 강의 하느라 바쁜 아내가 이번 달만 연속 세 번이나 ‘여교회’를 나간다니 의아했나 보다.“무슨 신흥 종교에 빠진 거 아니지? 갑자기 뭔 교회를 그렇게 자주 나가?”“이런 사오정 같으니라고. 교회가 아니라, 여 자 교 우 회!”둘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긴 나이 먹어 흐릿해진 청력 탓만 할 수는 없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일이니까. 졸업한 후로는 대학교 근처조차 갈 일이 없었다. 어쩌다 가끔 과모임에나 나갔지, 교우회가 있는지도 몰랐다. 30주년 홈커밍데이를 하면서 동기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자전거 동호회 ‘타바’에 가입하여, 혼자선 하지 못할 국토종주를 했다. 3년 전부터는 <교우회보> 편집위원에 이름을 올렸으니, 그나마 체면치레는 한 셈인가.그래봤자 가뭄에 콩 나듯 생색내던 사람이, 갑자기 열혈 교우로 등극하고 말았으니! 틈만 나면 걷기 여행이다, 전시회다, 음악회다, 미술사 강의를 들으러 들락거린다. 아무래도 이건 여자 교우회 회장님 탓이 크다. 신흥 종교 교주님처럼 존재감은 큰데, 실상은 무수리처럼 몸을 사리지 않는 신기한 분이다. 게다가 운영진들마저 어찌나 준비성이 강한지, 참석하는 우리는 그저 편안히 앉아서 누리기만 하면 된다. 여자교우회에 안 나가면 손해라는 말씀.벌써 4회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술사 강의는 인기 만발이다. 강사의 탁월한 지식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뿐인가. 강의가 끝나면 별책 부록으로 고급스러운 간식과 음악 연주가 기다리고 있다. 다들 ‘오늘의 잿밥’은 과연 뭘까 기대하는 눈치다. 어쩌면 내년 봄에는 강의를 들은 사람들끼리 열흘 넘게 파리와 피렌체로 미술관 유람을 떠날지 모른다. 남자 하나 없는 여자교우회가 뭐 그리 재미있을까, 그때도 남편은 배웅을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겠지.
20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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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 정신 83학번인 나는 올해 사람들로부터 원치 않는 인사를 받는 일이 많아졌다.“올해 회갑이라면서요? 축하해요.”아니! 이렇게 젊고 에너지 넘치고 마음은 청년인데 회갑이라니? 하지만 거부한다고 해서 온 회갑이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된 바에야 태어나서 두 번째 맞는 갑진년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본다. “외쳐라 고대정신, 태양을 향해!” 라는 응원가 가사가 있다. 고대정신은 뭘까? 싸움에 나가 이기는 것만이 능사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기기 위해 살아왔던 것 같다. 경제적인 자립, 가정의 유지, 자식 농사와 세상 출세를 위해 적과 싸우기도 하고 때론 나를 이기기도 하면서 그렇게 꾸려온 시간들이 나의 ‘인생정신’이었다. 그렇다면 귀가 순해진다는 이 나이에는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할까.사업을 일궈서 큰돈을 번 내 친구 하나는 문득 후손들이 포털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했을 때 “우리 할머니는 돈만 잘 번 사람이었구나”로 손자들에게 인식되고 싶지 않았단다. 그녀는 사단법인 ‘세이브더얼스’를 만들었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투자해서 자연과 인간의 균형 있는 공존을 추구하자는 뜻으로 작은 활동들을 시작했다. 회갑의 나이에 고통받는 지구를 위한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것이다.올여름에 열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집행 위원장도 회갑을 맞았다. 여성 감독이 진출하기 어려운 영화산업의 현실을 주목하고, 그들에게 창작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 소박하지만 힘있게 26회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시사회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된 영화 ‘정돌이’는 가정 폭력과 가난을 피해 가출한 어린 소년을 고대생들이 학교로 데리고 와 정경대에서 먹이고 재우며 어른으로 성장시킨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우한 소년을 함께 돌보며 당시의 고대생들은 주머닛돈을 털어 안경도 사 주고, 장구도 가르치고 하면서 키워낸 것이다.한 친구는 주변의 지인들과 기금을 모아 작은 집을 마련, 18세에 보육원을 나가야 하는 여자 아이들에게 황량한 세상으로 나가기 직전의 정거장으로 내어 주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나만 잘 쓰고, 잘 먹고, 잘 놀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안 가본데 가봐야 하고, 안 먹은 거 먹어 봐야 하고, 안 해본 걸 해 봐야 한다면 그 버킷 리스트에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적어볼 때인 것 같다. 김훈 선생님의 책 ‘남한산성’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특별한 올해, 내게는 고대정신이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가 아니라 ‘나누자!’로 다시 정의되는 의미 있는 갑진년 회갑 생일이 될 거 같다.김미경(독문83) 편집위원방송작가
202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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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영(사회87) 편집위원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50대 중반에 이른 주변 친구들과의 술자리 대화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아들과 대화하는 법이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카톡을 보내면 ‘읽씹’이나 ‘안읽씹’ 둘 중에 하나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한자가 ‘아들 자’라는 아재개그도 있다. 둘째, 전화를 받아도 아들이나 아버지나 할 말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엄마 어디 갔니?”라는 말도 있다. 셋째, 가족모임처럼 꼭 할 말이 있을 때는 개인톡보다는 가족 단톡방을 이용한다. 이런 식으로 아들과 대화하기 어려운 이유를 모두 꼽자면 매달 ‘자명고’ 칼럼을 시리즈로 써도 부족하다. 대략 나의 아들 세대인 15학번 이후 교우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을지도 모르겠다. 첫째, 아버지가 대화를 시작하는 방식은 보통 세 가지로 요약된다. ‘밥은 먹었냐’, ‘공부는 잘 돼 가냐’, 아니면 ‘회사는 다닐 만하냐’. 둘째, 중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대화한 기억은 없는데, 요즘 아버지의 잔소리는 엄마를 추월할 기세이다. 여성 호르몬이 늘고 있다는 증거다. 셋째, 저녁 먹고 게임 좀 하면서 중간고사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데 아버지는 소맥을 만다. 핑계는 ‘대화’다. 사실 아버지와 대화가 어려운 이유를 모두 꼽자면 나도 ‘자명고’ 칼럼을 쓰고 싶다. 고대를 앞세운 이런저런 모임에서 재학생들과 마주앉을 때가 있다. 분명 아들과 같은 나이뻘인데도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은 다르다. ‘하느님과 동기동창’인 선배의 ‘라떼’ 시리즈를 경청하려는 자세가 충만하다. 다음날 ‘앞으로도 자주 뵙고 좋은 말씀 어쩌구 저쩌구’하는 카톡을 보내오는 것도 기특하다.교우회에서도 10년 간격의 선후배 소모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87학번인 필자가 졸업 학과나 동아리, 동문회의 97학번과 07학번들을 한 자리에 초대해 보는 것이다. 과거 학교생활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부모자식 관계 같은 일상다반사들을 나누다 보면 아들과 대화하는 법이나 아버지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긴급조치와 6‧10항쟁. IMF 위기와 리먼 브러더스 사태, 코로나19와 비대면 수업 등, 당대의 역사적 편린들이 서로 다른 세대의 삶에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고대판 사회학 연구 프로젝트가 탄생할 것이다. 74학번 승명호 교우회장님께서 솔선수범하시는 방식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가을바람 부는 좋은 날을 골라 84학번, 94학번들을 불러 막걸리 한잔씩 따라주시면 어떨까. 04학번들이 이를 본받아 14학번들을 부르면 새내기 24학번까지도 따라올 수 있겠다. 물론 64학번과 54학번 선배님이라고 해서 굳이 빼어놓을 필요는 없겠다. 사실 10년까지는 ‘맞다이’로 들어와도 충분히 얘기가 통한다는 게 고대 선후배들의 자랑 아니던가.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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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영(산자97) 편집위원과학칼럼니스트고려대학교를 상징하는 색상은 ‘크림슨’, 동물은 ‘호랑이’, 교목은 ‘잣나무’다. 교정 어디서든 크림슨 색상을 만날 수 있다. 본교 정문은 1965년 고대교우회가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헌정했는데, 양쪽 아치에는 호랑이 얼굴이 조각돼 있다. 1968년 5월 19일에는 재단이사회와 교무위원회가 잣나무를 교목으로 선정했다. 잣나무는 고소한 맛의 열매를 지녔기 때문에 씨를 뜻하는 한자의 ‘자(子)’에 사이시옷이 덧붙여져 유래한 이름이다. 바늘 모양의 잎은 5개가 한 다발로 모여 자란다. 비슷하게 생긴 소나무는 2개의 잎이 한 다발로 모여 자라기 때문에 모여 자라는 잎의 개수를 확인하면 두 나무를 구별할 수 있다. 잣나무는 소나무과 소나무속(Pinus)에 속하는데, 소나무속은 소나무와 잣나무, 백송, 곰솔, 스트로브잣나무 등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100여 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소나무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Pine으로 통칭된다.소나무의 영어 이름은 Japanese Red Pine으로 ‘일본 붉은 소나무’이란 뜻이다. 반면 교목인 잣나무의 영어 이름은 Korean Pine으로 ‘한국 소나무’로 불린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잣나무가 한국을 대표하는 소나무라고 알고 있다. 잣나무의 학명은 Pinus koraiensis로서 한국 특산종이란 의미를 지녔다. 소나무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웃한 일본과 중국과 북한의 국경 인근, 러시아 연해주 지역까지 자란다. 이와 달리 잣나무는 추운 곳을 선호해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의 헤이룽장성과 지린성, 랴오닝성까지도 자라며, 러시아의 시호테알린산맥과 우수리강 유역에서 천연림을 이루고 있다. 이들 지역은 옛 고구려의 영토이자 시베리아호랑이의 서식지와도 포개진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수렵도’에는 말에 탄 채 호랑이를 쫓아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기는 고구려인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해마다 9월 23일이면 세계자연기금(WWF)에서 ‘세계 호랑이의 날’을 맞아 시베리아호랑이의 서식지인 잣나무숲에서 불법 벌목을 막아달라는 캠페인을 전개한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시베리아호랑이는 잣나무숲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구려, 호랑이, 잣나무는 혼연일체의 관계이다. 1946년 4월 모교는 고구려의 기상과 자주 불패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교명을 고려(高麗)로 바꿨다. 대한민국의 국호인 KOREA는 ‘고려’의 음을 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대학교(KOREA UNIVERSITY)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대학임을 선언한 것이다. 흔히 바위틈에서 굽어 자라는 소나무와 달리 잣나무는 줄기가 곧게 뻗어 자란다. 잣나무가 숲을 이루었을 때 그 꼿꼿한 기상은 더욱 돋보인다. 잣나무는 세계적으로 한국의 나무로 인정된 종이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나무이자 가장 고대다운 나무다.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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