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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엔피코스메틱㈜ 대표 권오섭(지질78) 교우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250억원 이상 기부평생을 바쳐 기부하는 문화가 모교에 이어지길“더 열심히 벌어 사회와 어려운 곳에 계속 기부하겠습니다.”올해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상한 권오섭 교우(지질78)는 수상 소감에서도 나눔을 강조했다.30여 년간 화장품 외길인생을 걸어온 권 교우는 실패와 역경을 딛고 성공 가도에 들어섰다. 엘엔피코스메틱 대표로서 화장품 브랜드 ‘메디힐’을 세계 45개국에 성공적으로 진출시키며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유니콘 기업으로 이끌었다.그의 가장 큰 덕목은 자신의 성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나눔과 봉사를 통해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특히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모교와 교우회 발전을 위해 250억원 이상을 기부하는 등 모교 사랑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면서 모든 고대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며 “앞으로 사회와 학교를 위해 봉사하라는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겸손한 마음을 드러냈다.맘 편히 공부할 곳 세워주고파무엇이든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기부를 먼저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사업에 뛰어든 권 교우도 마찬가지였다. 부채를 감당하면서도 기부를 시작했다.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모교 기부도 그런 취지로 진행됐다.“11년 반을 지질학 관련 공부를 하고 관련 일을 하다가 화장품 업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선후배들은 전공을 살려 연구소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전공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죠. 그들이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기부를 하게 됐습니다.” 미국 유학으로 선진국의 교육 환경을 경험한 것도 도움이 됐다. “전공 공부를 하며 미국 유학을 갔는데 학과마다 건물이 있더라고요. 성공한다면 내가 이런 건물을 하나 지어주는 것이 내 보람이 아닐까 생각했죠. 우리 후배들도 넉넉한 공간이, 교수님들도 연구실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지난 2020년 7월 준공식을 가진 메디힐지구환경관은 지하 1층, 지상 7층, 연면적 7041㎡(약 2130평) 규모로 권 교우가 나온 지질학과의 후신인 지구환경과학과가 들어섰다. “건축 자금으로 120억원을 냈는데 사실 건물 안에 연구 기자재들이 필요하잖아요. 과 후배였던 안성호(지질87‧에이스침대 대표) 교우와 논의해 각자 20억씩 더 기부했습니다.”훌륭한 선배들 본받아 교우활동권오섭 교우는 자신과 교우회와의 인연도 나눔을 실천하는 교우들과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은 것이라 말한다. 권 교우는 현재 고대경제인회 회장 등 교우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구자열 회장님, 문규영 회장님, 승명호 회장님 등 본받고 싶은 선배님들을 따라 함께 하다 보니 교우회와 인연이 깊어졌습니다. 교우들과의 끈끈한 친목뿐만 아니라 현재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교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죠.”비단 교우회와 모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회에 여러 기부를 진행하고 있다. 강서구 장학회, 법무부 청소년 범죄예방위원 서울남부지역협의회, 서울 남부지역 법사랑장학재단 등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메디힐 장학재단을 설립해 국내 대학생들과 교육 복지기관 등에도 지원하고 있다. 상생과 사회적 책임을 완수한다는 그의 경영이념이다.“꿈 포기 말고 항상 도전하길”이런 권오섭 교우의 행보는 다른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특히 성공을 꿈꾸는 학생들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거든요. 꿈꾸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항상 도전하기 바랍니다.”평범한 말 같지만, 실패와 성공을 모두 경험한 그의 말에는 울림이 있다. 1990년대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이후 겪었던 여러 좌절은 2009년 엘엔피코스메틱의 시작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홈케어 시장을 예견해 전문성을 강조한 마스크팩 브랜드 메디힐도 수많은 노력 끝에 탄생했다. 2015년 판매를 시작한 메디힐 마스크팩은 현재 누적판매량 30억장을 돌파했다. 중국, 일본, 미국 등 세계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현재 45여개국에 진출했다. 2018년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경영이념을 인정받아 2018년 대한민국 일자리 으뜸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지금 메디힐이 저에게 세 번째입니다. 한번은 완전히 망했고, 두 번째는 절반의 성공이었죠. 이제 조금 성공한 듯합니다. ‘남들이 하는 것이 좋아 보이니 나도 해볼까’해서는 성공하기 쉽지 않아요.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실패하지 않는 것이 더 좋잖아요? 실패하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두 번 실패하면서 몸으로 느낀 겁니다.”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청하자 그는 다시 기부를 강조했다. “한 번하고 끝나는 기부는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평생을 바쳐서 기부하는 문화, 그런 문화가 우리 고려대학교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래야 또 채워집니다. 기부하고 채우고 기부하고 채우는 그런 고려대학교의 선후배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이재익 기자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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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 강석희(농경제71) 교우 한인 정치력 신장 위한든든한 뒷배 될 것1992년 미국 LA, 한인 사업체들은 흑인들의 폭동으로 아비규환이었다. 경찰은 한인타운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한국인이 미국 사회에서 목소리가 약해서, 곧 정치력이 없어서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개인과 가정에 충실하던 이민 1세대 세일즈맨은 LA 폭동을 계기로 한인 사회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강석희 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의 이야기다. 한국 방문을 앞두고 화상 인터뷰로 만난 강 교우는 ‘자유, 정의, 진리’를 강조하며 녹슬지 않은 고대 사랑을 내비쳤다.자유, 정의, 진리로 미국에 서다1977년에 모교를 졸업한 강 교우는 같은 해 6월, 아내 최원희(식품공73) 교우와 함께 캘리포니아 땅을 밟았다. 전자제품 유통 기업 ‘서킷시티’의 아시아계 최초 총매니저, 2008년 어바인 시장 당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강 교우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도전정신의 원천을 묻자,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려대’라고 답했다. “원래부터 리더십이 있다거나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반장을 해본 적도 없죠. 그런 제가 고려대를 만나 제 안의 잠재력을 찾을 수 있었어요.”그는 모교의 가르침을 평생토록 가슴에 품었다. “비록 조국을 떠나 있지만 미국에서 공직 생활을 할 때도 늘 ‘자유, 정의, 진리’를 기준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모교의 교훈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인 이민 1세 최초 직선 시장 당선강 교우는 1993년부터 한인사회에 봉사하기 시작했다. 한미장학재단 이사로 활동하며 ‘한인사회를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있도록 힘쓴 사람’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장학 사업이 제가 한인사회를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발로 뛰어 모금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 주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죠.” 강 교우가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활동 저변을 넓혀가자, 주변에서 먼저 정치 입문을 권하기 시작했다. 성실함 하나는 자신하던 강 교우는 5개월 동안 하루 4시간 이상씩 발로 뛰어 어바인 시의 2만 가구를 직접 방문했다. “한 주민은 ‘20년 넘게 이곳에 사는 동안 내 집 문을 두드린 후보는 당신이 처음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찍겠다’라며 호응해 주셨어요. 유색인종의 이민자도 열심히 하면 뭔가를 이룰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어바인 시에서 2004년 시의원 당선, 2006년 재선을 거쳐 2008년 한인 최초 미주 지역 시장으로 당선됐다.순수한 봉사 정신으로 시작돼야2004년 중앙일보 칼럼에서 한 변호사는 강 교우의 정치 입문기에 대해 ‘정치 지망생들이 본받아야 할 정석’이라고 표현했다. 강 교우가 미국 사회에서 인종, 국적을 불문하고 지지를 받은 비결은 무엇일까. 정치인 강석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에 관해 묻자 일순 ‘순수함’이라고 답했다. “절대 개인을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발적으로 봉사하고자 시작했기에 모든 일에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행합니다. 간혹 ‘정치를 위한 선행 아니냐’라는 말을 들어도 떳떳할 수 있었죠. 그런 마음가짐이 지역사회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해요.” 경청하는 태도 또한 강 교우의 포용적 리더십을 뒷받침했다. “서킷시티의 영업 사원 시절부터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며 답을 찾았어요. 세일즈맨 강석희, 시장 강석희 모두 일관된 태도로 경청한 자세가 지역사회에 신뢰를 쌓는 바탕이 됐다고 생각합니다.”“I never give up!”신뢰와 성실을 바탕으로 이민자의 유리천장을 극복한 강 교우에게도 좌절은 있었다. 현직인 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 면접에서 세 번의 거절을 당하자 강 교우의 딸은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그만하라고 말렸다. 강 교우는 당시 딸에게 한 대답을 또렷이 기억했다. “You know your dad better. I never give up! (네가 날 더 잘 알잖니. 아빠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렇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붙잡아 대통령으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은 것에 더해 올해 1월에는 4명의 조달청장을 대표하는 선임 지역청장으로 승진했다.강 교우의 꿈은 여전히 미주 한인들의 발전으로 향해 있다. 그에게 앞으로의 소망을 묻자 ‘한인 출신 미국 대통령 배출’이라고 답했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할 수 있다면 우리 한인 2세, 3세들을 도와 미국의 연방 상원의원, 주지사, 나아가 한인 출신의 미국 대통령이 배출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강 교우는 한인회, 상공회의소 등 한인 정치 단체들이 한 마음으로 동참하면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대통령 배출이 가능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강석희 교우(앞줄 네 번째)는 이달 7일 김양현홀에서 재학생 약 280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박지호 기자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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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스틸 대표이사·일본교우회장 최상영(경영69) 교우 개인적 성취를 넘어서 사회와 상생하는 삶 추구 재일교포 3세인 최상영 교우는 일본에서 영스틸을 창업해 굴지의 철강무역회사로 키워냈다. 성공한 기업인에 그치지 않고 한일 민간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재일교포의 권리 증진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교우회에서 2009년 특별공로상과 ‘올해의 교우상’을, 2018년에는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받았다. 올해 명예박사를 수여받으며 교우에게 주어지는 영예를 모두 얻었다. 지난달 명예박사 수여식을 앞두고 최 교우를 만나 재학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삶의 궤적을 들을 수 있었다. 풍요롭고 알찬 재학시절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떤 연유로 모교에 입학하게 되었을까. 와카야마 지역 한인사회의 대표 역할을 하던 그의 할아버지는 조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6·25가 터지자 아들 둘을 유엔군 지원병으로 참전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청소년기의 최 교우는 60년대 초 일본 언론에 보도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소식에 큰 관심을 가졌다. 민족을 위해 세워진 학교라는 점이 좋아서 모교를 선택했다는 최 교우는 4년의 재학시절을 다양한 활동으로 채웠다. 수영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최 교우는 국가대표 수영선수로도 활동한 바 있다. 모교에 재학 중인 재일교포 유학생을 모아 ‘호동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모교에 있는 동안 서로 도우면서 최대한 많이 배우고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작은 조직이었는데, 점차 타 대학 학생들도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이 됐죠.” 4·19혁명에 감명 받았던 그는 데모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모교에서 특별한 인연도 맺었다. 평생의 반려자인 박귀원(불문70) 교우를 만난 것이다. 최 교우는 졸업하자마자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한 박 교우를 데리고 일본에 돌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박 교우에게 생활이 안정되면 꼭 다시 복학시켜주겠다던 약속은 20여 년이 지나 지켜졌다. 박 교우는 2001년 졸업했다. 기업 이익뿐 아니라 사회적 공헌이 중요졸업 후 최 교우는 가업인 건축업을 잇는 대신 철강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재일교포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인과 똑같이 해서는 한국인의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일본인보다 더 많은 시간 열심히 일했습니다.”최 교우는 20년 간 다녔던 직장이 도산하자 철강무역회사 영스틸을 창업해 현재 연매출 6000억 원을 상회하는 큰 회사로 키워냈다. 그는 기업의 이익창출에 못지않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 공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해왔다. “제 부모 세대는 파친코 운영이나 고리대금업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차별받고 억압받았죠. 외국인이라도 훌륭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일본 사회 내에서도 한국인과 일본인이 상생하며 발전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 교우는 한일 민간 교류에 가교 역할을 자처한 것은 물론 재일 민족학교 네 곳에 장학금을 후원해 다음 세대가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2004년에는 재일교포들과 함께 헌법소원을 제기해 재외국민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12년부터는 재일본 대한체육회장을 맡아 일본 내 우수한 체육 인재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있다.일본에서도 고대정신 이어가최 교우는 일본에서도 모교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글로벌 인재 장학금, 국제화 기금, 미래노벨상 기금 등 다양한 발전기금을 기부했고, 2002년부터 올해까지 22년 동안 일본교우회장을 역임하며 해외교우회의 수장으로서 모범적인 활동을 펼쳤다. 2003년부터 시작된 와세다대학교우회와 고대교우회의 교류협정도 최 교우가 힘쓴 덕분이다. 또한 모교 럭비부 선수들이 럭비 명문인 와세다대학 선수들과 함께 훈련받을 수 있도록 전지훈련 비용을 대기도 했다. 이후 모교 럭비부 선수들의 기량이 눈에 띄게 좋아졌으며, 매년 모교-와세다 친선 경기를 치르고 있다. “아버지께서 항상 돈은 더럽게 일해서 벌고, 쓰는 것은 깨끗한 데 쓰라고 하셨어요. 열심히 땀 흘리며 벌어서 좋은 곳에 쓰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거죠. 그 좋은 곳이 제게는 모교입니다. 졸업한 뒤에도 모교에서 배운 고대정신은 영원히 남아있습니다.”이번 명예박사 수여에 대한 소감을 묻자 최 교우는 “부족한 제게 왜 박사학위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모교에 많은 일을 하라는 뜻에서 준 거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사회적 환원을 이어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지원 편집장모교 발전과 교우 화합에 기여한 공로 인정받아 명예박사 수여해외교우회 본보기 제시후배들을 위한 아낌없는 지원최상영(경영69) 교우가 지난달 22일 모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날 행사에는 김병철·염재호·정진택 전 총장과 승명호 교우회장, 최 교우의 수여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69동기회 교우들, 일본의 가족들과 교우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최 교우는 영스틸을 경영하며 철강 무역으로 한일 경제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과 2009년 상공의 날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바 있다. 재일본 대한체육회장으로서 체육 인재 발굴과 다양한 후원 사업을 펼치며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최 교우는 일본교우회장에 선임된 이래 모교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조성에 꾸준히 힘을 보태고 있으며, 와세다대학과 모교의 우호 관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모교는 작년 최 교우를 모교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김동원 모교총장은 “최상영 일본교우회장님의 뜻을 따르며 모교도 미래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최 교우는 “제가 기업이나 사회에 이바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룬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진실한 마음으로 기부를 이어 가겠다”고 답했다. 박지호 기자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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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동 블루스》 출간 고형진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모교 모습 담은 문학 작품 소개학생들, 학교 안에 숨은 보물 찾길고형진(국교78) 명예교수가 모교와 그 주변 지역인 서울 안암동, 제기동의 모습을 담은 책 《안암동 블루스》를 출간했다.교가, 응원가, 막걸리 찬가 등 교우들에게 익숙한 노래와 조지훈, 오탁번 등 모교 문인들의 작품 등을 해설과 함께 담았다. ‘스팀 목련’이나 ‘백원만 아저씨’ 같은 익숙했던 풍경과 인물의 이야기가 문학 작품을 통해 소개됐고, 저자가 학교에서 겪은 일화들이 함께 실렸다.지난달 27일 모교 서울캠퍼스 중앙광장에서 만난 고 교수는 모교 문화와 역사, 정신을 아는 것과 함께 점점 잃어가는 대학의 본질을 생각해보길 제안했다.출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요즘 고대생과 고대 구성원들이 학교 역사와 문화를 잘 몰라요. 졸업생도 마찬가지죠. 특히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그 현상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퇴임을 맞아 고려대 교우들에게 이를 알리고 싶었어요.고려대 역사를 기록한 책은 더러 있지만, 대부분 지식 설명으로 구성돼 독자들이 마음으로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고대의 풍물과 인물을 소재로 쓴 문학 작품을 통해 생활 속에 스며있는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또 제가 교수 생활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겪은 고대인과 학교의 모습도 에세이 형식으로 함께 소개했습니다.‘안암동 블루스’, 제목이 특이합니다19세기에 미국에서 발생한 블루스는 우리나라에서 7, 80년대에 유행했어요. 느리고 애상적인 곡조로 과거 대학 생활의 추억을 소환합니다. 요즘처럼 디지털 시대, 속도감 있는 시대가 아니라 옛날 아날로그 시대의 낭만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있죠. 또 지금과 다른, 상아탑으로서의 대학의 모습이 남아 있던 그 시대를 돌아보며 대학의 본질과 가치를 알리고 싶었습니다.대학의 본질과 가치는 무엇일까요과거 대학은 학문과 문화예술의 공급원이었습니다. 대학가 축제에서 보이던 오락프로그램들이 공중파에 나오기도 했고요. 지금은 오히려 학생들이 대학 밖의 것을 따라 하죠. 민간 분야가 발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자연스럽기도 합니다.학문도 마찬가지예요. 기업이 발달하며 대학의 역할과 기능이 과거보다 많이 축소됐습니다. 대학과 기업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게 됐죠. 그런데 전통문화의 유지, 발전이나 예술 창조 등은 상업적 가치가 우선되는 기업에서 맡기 힘듭니다. 대학의 몫이에요. 한 나라의 정신적‧문화적‧도덕적 가치를 세우고 연구하는 곳은 대학일 수밖에 없어요. 그 가치와 본질을 좀 더 찾아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의 기능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90년대 학번 문인의 작품까지 다루다 보니 재학생들은 거리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원만이 아저씨나 문과대 앞 목련이 스팀 증기로 인해 아무 때나 피는 현상은 이제 옛이야기가 됐죠. 대학의 과거 모습 속에서 그 본질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만이 아저씨에게 돈을 준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는 설에서는 원만이 아저씨를 일종의 도인으로, 학교는 사회와 거리를 두고 학문에 힘쓰던 상아탑의 모습을 엿볼 수 있죠.또 문인들이 그 대상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승화하는지 살필 수 있어요. 가령 ‘고려대학교(오탁번. 1994)’는 학교 정문에 문패가 없다는 내용이잖아요. 정문은 이미 60년대에 세워졌는데 말예요. 그것을 관찰하고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고대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무형의 사상은 마치 보물처럼 숨어있어요. 문인들이 이를 어떻게 통찰하고 승화시켜 학교의 유산으로 만드는지 그 과정을 보는 의미가 있죠. 교가도 막걸리 찬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사와 곡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명곡이 나왔어요.학교 도서관과 박물관에는 숨겨진 보물이 여전히 많습니다. 제가 백석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아내 연구하게 된 것처럼요. 또 다른 보물을 찾는 것은 오늘날 고대생들의 몫입니다.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요즘 학생들이 교가나 응원가를 정확하게 부르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선후배 사이에 전수가 잘 됐어요. 우리도 뭐 교수한테 배웠나요? 선배한테 배운 거지. 고대의 응집력은 이런 노래나 예술품을 통해 전해지는 거예요. 최근 문화예술을 소홀히 하는 현상과 맞물려 고대 전통도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막걸리 찬가처럼 무언가를 함께 노래하면 공동체 의식이 생겨요. 그것이 곧 고대의 응집력이 되고 고대 역사를 계승합니다. 이 책이 소중한 문화 자산을 돌아보고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이재익 기자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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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소설사》 출간 송하춘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낮에는 교수, 밤에는 소설가로한국 현대 소설의 역사를 담아내다송하춘(국문68) 명예교수는 1981년부터 모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소설 창작을 강의했고 《발견으로서의 소설기법》을 비롯한 연구 저서 5권을 집필했다. 재학 중이던 197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해 《하백의 딸들》을 비롯한 소설 7권, 산문집 2권을 출간했다. 소설가, 교수자, 연구자라는 세 길을 40년간 동시에 걸은 셈. 2010년 정년퇴직 이후론 집필에만 전념해온 그가 최근 《한국현대소설사》를 출간했다. 상 타는 재미로 시작한 문학문학에 대한 생애 최초의 기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한학자인 할아버지에게서 5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강암 송성용 서예가를 아버지로 둔 그였다. 또래보다 일찍 글과 예술을 접한 남다른 유년 시절이었을 터. 그러나 그의 답은 의외였다. “제 문학의 시작은 예술적이지 못했습니다. 자라온 가정의 영향도 있겠지만 중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니 상을 탔고, 작품을 쓸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예감이 들어 국문과를 지망했을 뿐이죠. 모교 국문과 <창작론 및 연습> 과목에서 과제물을 제출할 때마다 칭찬을 받길래 전국 대학생 문학작품 선발대회에 응모했더니 일등 당선이었고, 졸업할 즈음 신춘문예에 응모했더니 당선됐습니다. 상 타는 재미로 시작한 문학이라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라고 멋쩍은 듯 말을 줄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행운의 나날들 “내가 배운 <창작론 및 연습>과목을 내가 맡아 가르치다니, 그것 자체가 나로서는 얼마나 행운의 인생인지!” 송 교우는 졸업 후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창 시절 그를 소설가의 길로 안내한 수업을 가르치는 ‘행운’을 얻었다. 국문과 학생뿐 아니라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직접 한 편의 소설을 썼다. 한 학기 100명, 1년이면 200명의 학생들이 작품을 써냈다. 10편의 작품을 선정해 송 교우의 해설을 붙여 모교 출판부에서 《소설발견》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책이 나오면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며 작가가 되라고 꼬드기기도 했던 그는 교실 안에 잠복해 있는 원석을 찾아내고 보석으로 닦아내는 일이 천직이었다. 학생들 중 현재 작가로 활동 중인 이들도 있다. 두 마리 토끼 노리는 포수의 심정모교 학생들의 창작 실력을 내리 칭찬하던 그에게 스스로를 어떻게 평하냐고 묻자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전 대학교수로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리는 포수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낮에는 학교에 나가 학문하는 척하고, 밤이면 집안에 틀어박혀 소설가인 척하는 격이 됐죠. 학문과 창작 그 어느 한쪽에도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엄격하리만큼 겸허한 그의 태도는 소설에 관한 그만의 정의에 연유해 있다. “전에는 소설가가 ‘좋은’ 소설만 써야 한다고, 또 스스로 그에 걸맞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좋든 나쁘든, 굶어 죽든 배불러 죽든, 작가는 소설만 쓰다가 죽어야 소설가입니다. 이에 비하면 저는 소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소설 교사일지언정 진정한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는 못됩니다.” 송 교우는 퇴직만 하면 창작활동에 전념하리라 굳게 다짐하기도 했으나, 퇴직 이후에도 소설사전을 연달아 펴내며 연구 활동의 궤를 이어나갔다. 퇴직 14년째인 올해 출간한 《한국현대소설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없는 법이더군요. 결국 자기가 하던 걸 관성적으로 하게 돼있어요.” 신간 《한국현대소설사》 펴내신간은 근대 개화 초부터 해방 이후까지를 다룬다. 송 교우는 2000년부터 15년간 해당 시기의 한국소설을 사전으로 이미 엮었다. 제자들과 함께 국내외 도서관에 있는 모든 한국소설을 수집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그 결과물이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 《한국근대소설사전》다. 그는 이 시기 문학사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 현대 문학사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와 함께 합니다. 우리의 문학이 조국 상실과 비자율적인 모순의 시대와 함께한 것이죠.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편찬 계기는 거창하지 않고 소소했다. 소설사전 작업을 함께한 제자들이 열어준 송 교우의 팔순 잔치에서 “이젠 소설사 한 권 쓰셔야죠.”라는 제자들의 강요 아닌 강요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해냈다는 후련함보단 아쉬움과 걱정이다. 국문학과가 점차 미디어, 콘텐츠 관련 학과로 개편되고 있다. “소설사, 소설론, 시론, 시사, 희곡론, 희곡사 모두 과거의 전통학문이 돼버렸습니다. 이번 신간이 전통적 국문학 연구의 마지막 작업이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최근의 생활을 묻자 오전 한나절은 집 근처 커피숍에서 집필에 전념, 남은 시간에는 발길이 가는 대로 걷는다고 한다. 차기작은 김소월 시인을 다룬 소설이다. 그는 지금도 한국현대소설사의 다음 장을 채워나가고 있다. 올해 2월 출간된 《한국현대소설사》. 지유진 기자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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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는 지난달 ‘미래기술을 이끈다’는 주제로 엔도로보틱스 대표이사 김병곤(기계공07)교우와 엔비디아 시니어 매니저 박수인(전전전99) 교우를 인터뷰한 바 있다.이번호에서는 같은 주제로 모교가 보유한 첨단 기술의 사업화를 지원하는 고대기술지주회사 대표 장재수 대표를 만나보았다. 고려대학교 기술지주회사 장재수(전자공81) 대표 “수익 실현을 넘은 본교 창업 분위기 확산이가장 큰 성과입니다”고려대학교 기술지주회사(이하 고려대기술지주)는 모교가 보유한 기술의 사업화를 촉진하고, 교원 및 학생이 창업한 기업을 집중 육성하고자 2009년 10월에 설립됐다. 창출한 수익을 모교의 연구개발 비용으로 재투자해 사학 재정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 고려대기술지주는 현재까지 기술기반 창업기업에 137건, 총 377억원을 투자했으며, 투자기업의 총 기업가치는 1조6000억원을 넘어섰다. 투자기업 선발 기준은 무엇인가요첫째로 창업의 근간이 되는 아이디어와 기술이 정말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지, 둘째로 실제 사업을 할 수 있는 전문성 있는 팀을 구성했는지, 셋째로 사업 모델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는지, 마지막으로 사업 모델이 사회와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입니다. 이러한 선발 기준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을 개척한 경험이 있는 산업계 전문가를 비롯한 투자업계의 외부 전문가가 투자 심사 과정에 참여해 사업화 타당성을 검증하고 있습니다.주목할 만한 성과는 무엇인가요2020년에는 고려대기술지주가 흑자로 전환했으며, 이후에도 흑자폭이 계속 커지고 있어 대학 창업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입니다. 무엇보다도 모교의 창업 분위기 확산에 기여한 부분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고려대기술지주가 투자하는 기업의 95% 이상은 딥테크(심도 깊은 과학적 발견과 연구를 기반으로 산업과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기술) 기업입니다. 대표적으로 ㈜라온텍은 고려대기술지주 첫 상장 기업이라 의미가 큽니다. 라온텍은 김보은(전전공87) 교우가 2009년에 창업해 마이크로디스플레이 반도체 칩과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입니다. 스마트폰용 DMB 수신 칩의 수요가 축소될 때 라온텍은 빠르게 마이크로디스플레이 산업으로의 진출을 꾀했습니다. 라온텍의 차별화된 기술력과 잠재력을 확인한 고려대기술지주는 운영 펀드를 통해 개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실험실 기업의 대표 사례는 세계 최초 무절제 수술 로봇 ‘로즈플랫폼’을 개발한 ㈜엔도로보틱스입니다. 고려대기술지주는 ㈜엔도로보틱스의 투자유치 과정을 지원해 작년 Series B 투자유치로 110억원의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투자회사를 대상으로 보유지분의 일부를 매각해 4년 만에 30배의 수익을 회수했습니다. TIPS(민간 주도의 기술 창업 아이템 집중 육성 프로그램) 공식 웹사이트에서 제공된 자료를 기준으로, 고려대기술지주는 전국 104개 TIPS 운영사 중 5위의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대학기술지주회사 중에서는 서울대, 포스텍, 카이스트 등을 제치고 1위를 달성하였습니다.학술연구를 사업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무엇인가요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라고 토로하는 부분은 기존의 연구개발 중심에서 시장 중심으로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려대기술지주에서는 투자기업의 시장 진출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위한 자금 확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고려대기술지주는 투자 이후 투자기업이 TIPS 프로그램에 선정될 수 있도록, 초기에 최대 20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보유한 기술의 시장검증을 돕고 있습니다. 특히 초기부터 글로벌 진출을 염두에 두고 실리콘밸리 소재 KU글로벌센터를 통해 현지 교우 기업인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딥테크 기업에 대한 투자경험과 이해도가 높은 외부 투자자를 선별, 연 4회 비공개 기업설명회를 개최해 자문을 구하고 있습니다.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 창업의 성공사례를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현재는 상장과 인수합병 등 의미 있는 성과가 1년에 1~2곳이 지속적으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교우기업들이 참여하는 투자펀드를 결성해 유망기업에 대한 후속투자를 지원하고, 수익금의 일부는 학교에 기부하는 교우 투자펀드 결성에 대한 의견도 수렴해나가려 합니다.정윤석 기자
20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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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송길영(전산88) 교우 “더 이상 집단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핵개인이 옵니다”모교에서 컴퓨터과학을 공부하고 다음소프트 부사장을 역임하는 등 송 교우는 데이터로 사회를 분석하는 명실상부 ‘빅데이터 전문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마인드마이너’라 칭한다. 빅데이터라는 광산에서 시대의 마음을 캐고 미래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고 싶다는 송 교우. 최근 그의 저서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가 10만부 이상 팔리며 출판계를 뜨겁게 달궜다. 삼성동 소재의 한 카페에서 송 교우를 직접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핵개인이 온다100세 이상의 생애주기 및 생산인구와 부양인구의 불균형으로 가족 내부에서 해결되었던 돌봄 시스템이 무너지고, AI자동화로 일자리가 대체되며 평생직장은 옛말이 됐다. 급변하는 하루하루에 불안감이 증폭되는 시대, 송 교우가 자신이 분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핵개인’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핵개인은 물리적 독립뿐 아니라 자기 주체성을 지니고 어떤 집단으로부터도 심리적 자립을 이뤄낸 사람을 일컫는다. “과거엔 단단히 결속된 공동체에 의탁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죠. 이젠 사회가 이완됐고, 더 이상 집단의 결정에 순종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기 삶의 결정을 내리고 싶어하는 핵개인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변화죠.”청춘도 환갑도 불안하다직장, 하물며 가족으로부터까지 홀로 서는 핵개인이 돼야 한다는 주장은 다소 파격적이다. 기성세대가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을까, 송 교우에게 반문했다. “세상의 역학이 변하고 있습니다. 모른 체하지 말고 맞춰 나가야 해요. 저는 일기예보처럼 다가올 시대의 예보를 드린 거예요. 구름이 끼고 비가 올 것이기에 우산을 준비해야 합니다.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에요. 기성세대도 받아들이기 싫을 뿐,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특정 세대의 문제로 갈음하는 것은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가 개인이 자립할 수 있는 환경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중장년층도 충분히 핵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젊더라도 이전의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핵개인이 아닌 것이죠. 세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입니다.”오리너구리가 되자송 교우는 핵개인의 도래뿐 아니라 기술혁신으로 기존 업무 대부분이 자동화로 대체되는 것 또한 불가역적 흐름이라 말한다. “정형화된 일은 자동화되고, 창조적인 사고력만이 남습니다. 이거는 직시하셔야 해요. 유튜브를 하건,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건, 인턴십을 하건, 창업을 하건 자동화되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찾아야 합니다.” 쉴 틈 없이 매 순간 변화에 적응하고 남들보다 뛰어나야만 인정받는 무한경쟁의 암울한 시대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송 교우가 ‘오리너구리’라는 뜻밖의 단어를 꺼냈다. “오리너구리는 오리너구리과 오리너구리속 오리너구리종입니다. 부리가 있는데 헤엄을 치고, 알을 낳는데 젖을 먹입니다. 기존의 어떤 분류 체계에도 부합하지 않죠. 이처럼 분류되지 않으면 경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리너구리가 되길 바라요. 평가받을 때 누군가 침입할 수 있는 일반적 형태의 노동을 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경쟁의 추이를 따라가는 겁니다.” 송 교우가 자신을 마인드마이너라 칭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마인드마이너는 제가 직접 만든 직업이에요. 이미 존재하는 ‘빅데이터 전문가’라고 하면 또 다시 경쟁해야 하니깐요.” 안락한 울타리 너머 자립의 미래그의 주장은 얼핏 비관적으로 들리지만 깊이 생각하면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발견할 수 있다. 가족주의적인 안락한 공동체의 울타리에서 벗어난다는 건 동시에 수직적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권위주의, 비전 없는 기계적 노동, 맹목적 충성을 바라는 평생직장의 환상을 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는 주체적 개인으로 발돋움하여 자신만의 꿈을 전 생애에 걸쳐 구현시키는 것, 그러한 핵개인들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이룩한 성긴 연대의 미래가 울타리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느슨해진 연대 속 사각지대를 단단한 사회안전망으로 채워나가는 것이 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가족과 조직에 헌신하는 것. 아름다운 이야기인데, 집단에 길들여져 타의로 하는 순간 내 인생을 살 수 없어요. 개인이 자립할 만큼의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지금의 행운을 누리세요.” 지유진 기자
20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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